축제와 나그네
최성수
춤을 추고 싶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점잖은체 하다가
어두운 곳에서 슬쩍 부딪히는 눈 웃음에 춤추고 싶었다.
오늘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그립다
사람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살아야 하나 보다
화려한 불빛 술픈미소에 나는
갈곳도 없이 헤메이는 나그네
하늘을 보면 금세라도 울 것만 같아 두 눈을 꼭 감아도
우리 사는 이 곳은 아직까지 슬픔이 남아
모두 혼자서 걸어가는 나그네
하하 아하하
우린 저마다 외로움을 지닌 채
얼굴 숨기고 살아가는 나그네
살다가보면 진실은 멀어져 가고
혼자서 걷고 있을 뿐
계절이 바뀔때면 비가 오는 것처럼
내일이 오면 떠나가는 나그네
우린
참 찾기도 힘들다. 다음에서 듣기는 되는데 배경음악이 안 된다. 그렇다고 달리 동영상을 찾으려 해도 눈에 띄는 게 없고. 사실 최성수 노래 가운데서도 상당히 마이너한 노래거든.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아니었을 것이다. 이 노래와 목련꽃 필 무렵. 그러나 나는 최성수의 노래 가운데서도 이 두 노래를 무척 좋아했기에.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 노래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노래에 얽힌 사연 때문이 더 컸었다. 아마 라디오에선가 최성수가 나와 스스로가 직접 밝혔던 그.
원래 이 노래는 가사 없이 곡만 먼저 완성되어 있었단다. 가사를 어떻게 붙여야 할까 고민하면서 때때로 공연에서 허밍으로 들려주고 했었다는데, 어느 방송에선가? 방송에 나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날따라 화려한 안무를 선보이던 댄서들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작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자신인데, 마치 자기는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은 무대 위의 댄서만 보고 있었다고. 그 순간 찾아드는 고독과 소외감. 그것이 이 노래 축제와 나그네의 주제였다. 축제란 당시의 무대이고 나그네는 자신의 무대에서조차 손님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라. 물론 실제 그런가는 최성수 자신만 알겠지만.
가끔 내가 블로그에서 지랄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죄다 저렇게 듣고 저렇게 대꾸하고 있다. 정작 말하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들이 죄다 저렇게 듣고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 그 소외감이란... 그거 아주 지독한 거다. 남의 블로그에 와서 자기들끼리 좋아라 떠드는데 정작 내 자리는 없다고 하는 그 느낌이란 것은.
군중속의 고독이라 하던가? 같은 것이다. 말이야 내가 하는 것이지만 듣는 것은 제각각이다. 일단 내가 말을 내뱉고 나면 그 다음 그것을 듣는 것은 듣는 사람 마음이다.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대꾸하는가. 나를 보고 나를 듣고 나를 겪고 나를 대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나로부터 비롯되지만 또한 나로부터 유리되어 이루어진다. 그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됨에도 마치 철저한 타인처럼. 손님처럼. 자기로부터 소외된다는 고독이란 어떤 것일까.
군중속의 고독이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다. 자기로부터의 소외다. 정확히는 타인을 통해 비쳐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소외다. 나를 둘러싼 누구로부터도 나를 찾을 수 없다는. 나를 둘러싼 누구로부터도 나를 볼 수 없다는. 아예 외면해서도 그렇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소통하는데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로부터 유리되어 있기에.
차라리 한두사람이라면 좋다. 얼굴을 마주하고 살을 맞대고 숨을 느낄 수 있다면. 오해하는 만큼 바로잡고, 잘못 아는 반큼 고쳐주고,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알려주고, 그리고 또한 나도 상대를 알아가고. 나를 정면에서 보여주고, 상대로부터 비쳐지는 내 모습을 또한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러나 그것이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열 사람이 넘고 스무사람이 넘어가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아옹다옹하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도 나누고 다투기도 하며 소통해가기에는 이미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규모가 더 커지는 것이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내 일임에도 나와 상관 없이 모든 것이 돌아가고 결정되어지고 있다는. 도시란 그래서 고독한 공간이다. 도시에서 그래서 사람은 소외되어 있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도시적인 정서란 화려함과 더불어 그같은 소외감, 고독감... 그래서 축제와 나그네다. 화려한 축제 속에 오히려 더 외로워하며 떠돌 수밖에 없는.
최성수의 음악은 그같은 도시의 소외된 이들의 감수성을 담고 있다. 고독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섬세한 그 시대의 감성을 감미로운 미성으로 녹여내고 있다. 마치 밤의 빗소리처럼 청명한 목소리는 우수에 젖고, 또한 최성수 자신도 상당히 도회적인 외모였던 터라. 말하자면 그 시대의 반영이었다. 외롭고 갈 곳을 잃고 있던.
고독을 어떻게 이기는가. 솔직히 답은 없다. 나같은 경우는 아예 고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차피 사람은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로를 온전히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사람이란 모두가 타인이다. 그러니 철저히 타인으로. 물론 그것이 쉽지 않기에 가끔 그렇게 지랄도 하는 것일 테지만. 그렇게 고독이란 애써 치장해도 어느샌가 균열이 일고 파열이 일 만큼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지랄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견디지 못할 만큼. 그렇게 해서까지 굳이 블로그질을 해야 하는가면...
역시나 외로우니까. 무언가 이렇게 떠들지라도 않으면 안 될 만큼 또한 외롭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블로그란 거울이다. 나 자신을 비쳐보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내가 하고 싶은 말들, 그리고나 자신,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때로는 위악을 걸치고 있는 거짓된 모습들까지. 외로움이란 다름아닌 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이므로.
어쩌면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 인간에게 외로움을 느낄 지성이 주어졌을 때, 그러나 아직 그 외로움을 이길만한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로움을 느낄 지성은 주어졌는데 외로움을 이길 수단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같은 모순이 인간을 항상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항상 그같은 외로움과 싸우며 무리를 짓고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전하고...
물론 그냥 해 보는 소리다. 어떤 사람은 말하겠지. 난 외롭지 않아. 나는 전혀 외롭지 않아. 소외되어 있지 않아. 그 말도 정답일 것이다. 내가 외로우니 외로울 뿐. 내가 외로우니 다른 사람도 외로워 보이는 것 뿐이다. 외롭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외로운 나 자신이 외로운 것이고.
고독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소외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안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나처럼 지랄도 하고, 미친 놈처럼 혼잣말도 떠들면서, 모니터 너머의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무어라 실컷 떠들어대기도 하면서. 두려운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다. 외롭지도 소외되어 있지도 않다.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같은 메마름이. 어쩌면 무지가.
사방에는 축제의 열기가 가득하다. 사람마다 각자 자기만의 축제를 벌인다. 모두가 모여 축제를 벌인다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에 각자 자기만의 축제다. 그리고 그 축제에 자기란 없다. 누구도 참가하지 않은 타인들만의 축제. 그것이 인간이라. 인간의 사회이고, 현대사회이고, 도시인 것이고. 우리 자신인 것이고.
이 노래를 들으면 그래서 부쩍 울적해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위로가 된달까. 나와 같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공감일 것이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다른 사람도 있구나 하는.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그것이 아마도 음악의 힘이라는 것일 게다. 문화의 힘이다.
아무튼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도 구하기가 힘들어서. 당당하게 돈내고 배경음악으로 구입하고 싶어도 배경음악으로 구입할 수 없다 하니. 그래도 어찌어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문제가 되면 지우더라도. 나는 가서 정당하게 돈 내고서 듣는다. 이해하시라. 다음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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