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고백 - 윤수일
네온이 불타는거리 가로등 불빛아래서
그 언젠가 만났던 너와나
지금은 무엇을 할까 생각에 잠기면
하염없이 그날이 그리워지네
불타는 눈동자 목마른 그입술 별들도 잠이 들고
이대로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 황홀한 그 한마디
지금도 늦지않았어 내곁에 돌아온다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
네온이 불타는거리 가로등 불빛아래서
기약없이 헤어진 너와나
지금은 어디갔을까 추억에 잠기면
하염없이 내마음 외로워지네
불타는 눈동자 목마른 그입술 별들도 잠이들고
이대로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 황홀한 그 한마디
지금도 늦지않았어 내곁에 돌아온다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
가사 출처 : Daum뮤직
나로 하여금 윤수일을 댄스가수로 인식케 한 노래다. 아파트는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원래는 그 전에 다른 노래로 먼저 윤수일을 알았을 텐데, 그 가사조차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반면 "황홀한 고백"의 경우는 학교 가면 윤수일의 안무를 따라추는 녀석들이 꽤 되었을 정도로 내 일상의 노래였다.
보면 알겠지만 참 격렬한 율동이다. 율동이라기보다는 춤이다. 아마 소방차가 나오고서나 이보다 더 과격한 춤을 추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이것도 파격이었다. 더구나 무대 위에는 보컬인 윤수일 혼자 나와 서 있고 주위에는 무용수들이 함께 춤을 추고 있었으니. 가끔 비치는 윤수일밴드의 밴드의 모습이란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내게 황홀한 고백은 댄스음악이었다. 연주까지 듣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 다만 지금도 윤수일의 춤 정도는 따라 출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윤수일의 음악세계는 참 독특한 것이었다. 그의 한국 대중음악사에서의 위치 자체도 무척 독특했다.
원래 우리나라의 락은 미8군무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멀리 타국에 나와 있는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세워진 무대에서 그들의 고향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본토의 음악을 연주하고 부르면서 미국의 선진적인 음악을 일찌감치 체화한 미8군출신 음악인들에 의해 락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중현이 바로 그 시조격인 인물로 그가 만든 애드훠는 우리나라 최초의 락그룹이었다.
이후로도 한국 락의 주류는 바로 미8군무대에서 출발한 이른바 밤무대라 불리우던 클럽무대에 있었다. 워낙 당시 주류 대중음악이란 트로트 등의 성인가요였고, 이들 클럽무대의 음악인 가운데 어설픈 자작곡보다는 본토의 세련된 음악을 본토의 연주인보다 더 훌륭하게 연주해내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경우도 있었기에, 주류무대로의 진출시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 밤무대에서만도 먹고 살 만큼은 되었다. 어차피 앨범 팔아서 먹고 살거나 방송 출연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시절은 아니었으니.
물론 그렇다고 아주 주류무대로의 진출시도가 없었느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신중현을 필두로 키보이스, 사계절, 들고양이, 사랑과 평화 등 많은 팀들이 앨범을 내고 주류무대로 진출하고는 했었다. 물론 대중의 호응도 좋았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해 바로 반응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군사독재정권. 조금 락이 살아날만 하면 바로 탄압에 들어서는 군사독재정권으로 인해 특히 70년대 말 가요계 정화운동이네 뭐네 해서 신중현은 물론 조용필까지 휘말리며 락은 물론 포크마저 초토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80년대 들어 신군부의 철권통치로 대학가의 그룹사운드마저 활동이 위축되고 있었으니...
바로 그런 때 윤수일밴드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무려 81년. 막 신군부의 철권통치가 한국 대중음악을 완전히 공동상태로 몰아넣던 그때, 대학가의 그룹사운드마저 위축되어 사그러들어가던 그때, "사랑만은 않겠어요" 이후 성인가요를 부르던 윤수일이 밴드음악으로 돌아가 전에 없이 강렬한 사운드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확실히 충격이었다. 지금 들으면 뭐 이런 가요가 다 있나 싶겠지만, 당시로서는 이 정도면 대단한 하드락이었다. 동시대에 활동한 송골매나 벗님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더 두드러진다. 더구나 윤수일밴드의 음악은 클럽무대로부터 올라온 한국 락의 정통이었다. 반면 송골매나 벗님들, 산울림 등은 스쿨밴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아마추어였다.
김수철이 당시 산울림을 디스하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게 음악이냐고. 그게 연주냐고. 사실 테크닉적으로 산울림의 연주는 그리 훌륭한 편이 못 된다. 곡도 잘 쓰고, 곡을 잘 소화해내기도 하지만, 연주인으로서 당시 산울림의 수준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송골매 역시 바로 그런 문제로 배철수는 멤버를 교체해가며 스쿨밴드라는 한계를 넘어 오래 갈 수 있는 밴드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에 비하면 윤수일밴드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클럽무대에 뿌리를 둔 프로페셔널 연주인으로 이루어진 밴드였다. 그런 만큼 이들이 들려주는 사운드 역시 차원을 달리했다.
무엇보다 손님의 취향에 맞춰 다양한 음악을 연주해야 했던 클럽무대의 특성대로 그들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직접 연주하고 부르며 몸으로 체화하고 있었다. 트로트에서 민요에서 락까지. 슬로우템포에서 빠르고 강렬한 댄스음악까지. 그리고 윤수일은 그같은 다양한 음악적 체험을 독학으로 공부한 이론을 더해 자신의 밴드 안에 녹여내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지금도 락의 장르적인 어떤 엄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윤수일을 인정하기를 꺼려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있기는 한데. 윤수일밴드가 과연 락인가.
그러나 지금 들으면 이런 뽕짝이 없고, 이런 가요가 없어도,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하다 할만한 제대로 된 락밴드였고 락사운드였고 락음악이었다. 다만 그것을 한국의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친숙한 멜로디에 실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 가사는 당시 사람들의 서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외록고 고립되고 갈 곳을 잃은 도시인들의 일상을. 그러면서 윤수일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한국의 대중들에 락을 들려주고 있었다. 송골매가 다시 날아오르고, 조용필이 락을 가지고 돌아오고, 부활과 시나위, 백두산에 의해 본격적인 한국의 락음악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말하자면 윤수일밴드란 70년대까지 축적된 한국 밴드음악의 역량을 이어받아 80년대 중후반 한국 락의 부흥기로 넘겨주는 고리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윤수일밴드의 음악이 가치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윤수일밴드의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 가운데서도 정점에 있었다. 한 마디로 많이 들리고 많이 불려졌다. 나같은 코흘리개 어린아이들까지도 윤수일밴드의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었을 정도이니. 윤수일밴드는 대중음악으로서 이제까지의 한국 락의 축적된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려 대중에 들려주며 이후의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들에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80년대 후반 이후 윤수일의 이름이 어느새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데에는 이런 부분 또한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참 대단했었다. 댄스음악인가 싶을 정도로 과격하고 화려한 무대매너라니. 사운드는 얼마나 신나고 흥겨운가. 묵직하면서도 빠르고 경쾌하다. 절로 춤이 추어질 정도로 흥겹고, 어느새 입으로는 노래를 따라부르는 내가 있다. 하긴 원래 락이라는 게 클럽에서 춤을 추면서 발전하기는 했었다. 윤수일 또한 술마시고 춤을 추는 밤무대 출신이었고. 마치 숭배라도 하듯 열광하는 락이 아닌 듣고 즐기며 따라부르는 말 그대로 대중적인 락이었다. 그것은 또한 당시의 젊음이 바라던 시대의 요구이기도 했다. 감미롭지만 어쩐지 쓸쓸한 가사와 마찬가지로 역시. 아마 계보를 따지자면 윤수일 밴드를 잇는 것이 부활이 아닐까 싶은데.
참고로 김태원이 유현상더러 직계선배라 하는 이유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김태원도 원래는 용인관광캬바레라고 하는 밤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유현상은 이전 그러한 밤무대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라스트찬스의 기타리스트였다. 유현상과 윤수일은 또 동갑으로 아마 세바퀴에서인가 그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었을 것이다. 아마 백두산이 아니었다면 유현상과 윤수일과 비슷한 풍의 성인가요로 먼저 - 그러나 윤수일보다는 한참 늦게 - 가요계에 데뷔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유현상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어쨌거나 김완선에 대해 쓰면서도 썼지만 락이란 것도 결국은 대중음악이다. 대중이 들어야 락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먼저 락에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락도 대중에 보다 다가갈 필요가 있다. 밤무대에서 바로 그런 대중과 마주하며 깨달은 노하우가 어쩌면 그래서 더욱 윤수일의 음악을 대중적으로, 토종의 어떤 것으로 들리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윤수일밴드가 있었기에 어쩌면 송골매와 같은 팀들이 별 거부감없이 대중들에 보다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 게다. 80년대 중후반 락의 부흥기에도 따라서 윤수일의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사실 음악적으로 보자면 이보다는 "환상의 섬"을 더 좋아하고 높이 친다. 좋아하기도 "아름다워"를 아마 더 좋아할 것이다. "제 2의 고향"이나 "도시의 천사"같은 노래도 좋다. 그러나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따라부르고 따라 춤추고 하던 기억이란. 어린 시절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러한 체험들이란. 그래서 "아파트" 올리는 김에 "황홀함 고백"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음악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여전히 들어도 좋다.
지금도 윤수일밴드의 음악을 들어보니 역시 윤수일밴드의 음악이다. 어렵지 않고 그러나 그렇다고 가볍지 않고, 바로 피부로 와닿는 친숙하고 정겨운 멜로디에 그러나 락의 본질을 잊지 않은 묵직한 사운드. 그리고 윤수일만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역시. 나이를 먹었어도 목소리는 여전하다.
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윤수일은 진짜 훈남이었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코도 오똑하고 눈썹도 짙고 눈도 크고... 저러고 차려 입고 있어도 자세가 산다. 더구나 인상까지 선해서. 이건 동시대의 조용필이나 조용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다. 저만한 기럭지에 외모에 노래에 음악에 춤에... 다시 봐도 멋지다.
어느새 쉰다섯. 조용필보다는 다섯살 어리고 유현상과는 동갑이고 김태원보다는 열 살 많다. 그러나 여전히 현역으로 기타를 들고 무대를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노익장이란. 너무 이를까? 아무튼 사람의 근본이란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는 법이라. 그가 너무 아름답다.
덧.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정작 밴드라면서 윤수일 말고는 멤버들 이름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 어쩔 수 없는 한계라 하겠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도 사실 그 멤버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지 않은가. 과도기였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밴드음악이 나타나기까지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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