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일까? 그러나 사실 그리 오래된 음악은 아니다. 바로 작년에 나온 백두산 4집에 수록된 곡이니. 단, 그 원곡이 1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백두산 2집에 수록되었으니 오래된 음악이기는 할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불행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김완선이나 시나위, 베이시스 등에 대해 쓰면서도 느꼈지만, 저작권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탓에 옛날 음반 같은 경우는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허다하다. 물론 음반을 사서 들으면 되기야 하겠지만 기왕에 MP3라는 편리한 것이 있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은 하루빨리 해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음악의 단절이 우려된다. 그동안 많은 음악인들이 힘들게 쌓아 올린 성과들이 그런 식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아무튼 듣기에 후련한 곡이다.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답답한 곡이기도 하다. 경쾌하게 후려갈기는 사운드는 후련하고, 촘촘하게 짜여진 얼개들은 허투루 들을 수 없도록 듣는 이를 압박해 온다. 더구나 유현상 특유의 샤우팅은. 어린시절 락커라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백두산 음악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다. 다만 영어가사라는 점 때문에 가사는 전혀 외우지도 알지도 못한다.
내가 지금도 가사를 잘 안 듣는 이유 - 당시까지도 팝을 듣는데 당연했다는 것이다. 가요는 수준이 낮다고 보았다. 그래서 팝을 많이 들었고, 당연히 팝은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영어가사들을 알아들을 주제가 되었는가. 그래서 가사조차 사운드의 한 부분으로 들었다. 가사가 이런 식으로 사운드와 어우러지는구나. 지금도 그래서 노래가사에 대한 평가기준이 얼마나 사운드에 잘 어우러지는가. 가사 내용은 별로 신경 안 쓴다.
"놀러와"에 나와서 김태원이 그랬을 것이다.
"시나위와 부활이 퓨마라면 백두산은 마치 호랑이와도 같았다."
당연할 것이다. 이미 커리어부터가 달랐다. 당시 유현상의 나이가 32살. 김창식과 한춘근도 그 연배였다. 김태원보다도 나이가 10살 이상이나 많았다. 신대철은 그나마 김태원보다도 두 살이 더 어렸다.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유현상은 이미 열일곱살 때부터 당대최고의 밴드로 꼽히던 라스트찬스에서 기타를 치고 있던 베테랑이었다. 라스트찬스를 거쳐 사계절에서 기타를 쳤고, 김태화가 미국으로 떠난 뒤 라스트찬스에서 보컬을 맡다가 82년부터는 최이철과 함께 사랑과 평화에서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한춘근은 유현상의 동네친구로 역시 라스트찬스에서 드럼을 쳤었고, 김창식은 아마 유현상이 세션을 뛰던 시절 알게 된 사이였을 것이다. 모두가 클럽무대에서, 그리고 세션을 통해 연주력을 갈고닦은 베테랑들이었다. 아무리 신대철과 김태원이 라이브로 실력을 갈고닦았다고 경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김도균도 백두산에 픽업되기 전 이태원 클럽무대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고.
오죽하면 블랙홀의 리더 주상균이 백두산의 무대를 보고서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라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겠는가. 우리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밴드이기도 했다. 그만큼 클럽무대에서 10년 넘게 갈고닦은 그들의 연주력은 당시 락씬에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신대철이나 김태원이나 그저 애송이에 불과할 뿐.
그러나 백두산 1집은 솔직히 기대이하였다. 분명 사운드는 훌륭했다. 연주 자체는 메탈의 그것이었다. 김도균의 속주는 여기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창식의 베이스나 한춘근의 드럼 역시. 그러나 유현상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가 쓴 멜로디라는 것이.
즉 지난번 윤수일에 대해 쓰면서 썼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유현상은 클럽무대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유현상은 그저 클럽무대에서 기타만 쳐서는 장래가 없다고 보고 현철이나 김정수 등 선배 음악인들과 마찬가지로 솔로음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현상의 솔로음반은 철저히 상업적인 성공을 노린 전형적인 대중가요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막 급조해서 만들어진 백두산의 1집에 쓰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유현상의 목소리는 스피디하고 파워풀한 메탈보다는 그같은 성인가요에 더 어울렸고. 아마 유현상이 그대로 1집 독집을 내놓았다면 윤수일과 많이 겹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욕도 많이 들어먹었다. 트로트 메탈이라고. 더구나 나중에 유현상이 트로트로 돌아선 것도 있어서 유현상은 원래부터 트로트 가수였다면서 들먹이고 하던 것이 바로 백두산 1집이었다. 10만장을 넘게 팔면서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그것은 유현상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존심 상하는 비판이었다.
절차탁마였다. 아마 피나는 노력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메탈에 필수적인 고음에 약하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메탈의 스피드를 따라가기 위해서. 그리고 유현상의 말에 따르면 하려고 하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되더라며 유현상 특유의 거친 쇳소리가 섞인 샤우트가 나오게 되었다. 스크레치가 섞인 센가성이라고나 할까? 두성과 센가성을 섞으면서 유현상만의 독특한 창법이 완성된 것이다. 힘은 부족하지만 그대신 날카롭게 치솟는 고음이 백두산의 음악을 정의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백두산 2집. King Of Rock'N Roll이었다. 이로써 백두산은 명실상부 한국최고의 메탈밴드로서 그 음악을 완성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 대한민국의 메탈이라. 그리고 이 앨범이 백두산의 작년 4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실상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당시까지 영어로 가사를 쓰면 안 되었다. 부분적인 영어가사조차 문제삼던 때라 전곡을 영어로 쓴다는 것은 허용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거의 전곡을 영어로 쓴 결과 거의 전곡에 대해 방송 및 공연 금지가 결정되었다. 한 마디로 방송에서도 틀지 못하고, 공연장에서도 연주를 못한다. 특히 공연을 해야 하는 밴드의 입장에서 이것은 활동중단 선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사실상의 활동중단 상태에서 견디지 못한 김도균이 먼저 영국으로 떠나 버리고, 남아 있던 유현상, 김창식, 한춘근 등도 더 이상 밴드를 유지할 이유을 찾을 수 없어 공식적으로 해체를 결정한 이후 - 그러나 그에 대한 보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 이후 1년 뒤 김도균이 돌아오고 그 사이 이지연이 데뷔하면서 유현상에게 백두산 해체의 책임이 지워지는 이유가 되어 버린다. -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90년대 초 유현상이 빠진 김도균, 김창식, 한춘근이 백두산 3집을 내기는 했지만 다시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들려오기까지는 아직 한참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그들은 돌아왔다.
2009년, 작년 여름 백두산 4집을 인터넷으로 주문해 들으면서 뭐랄까 그리움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제는 듣기 힘든 80년대의 메탈 사운드를 간직한 메탈의 원초성을 그대로 들려주는 음악이라니. 단순하면서도 간결했고, 그러면서도 힘있고 강렬했다. 유현상의 샤우팅은 여전했고, 김도균의 기타는 무르익었다. 김창식의 베이스와 한춘근의 드럼도 - 그러나 지금 백두산의 드럼은 박찬이더라. - 변화무쌍했다. 이런 음악이었다. 당시 우리가 듣고 열광했던 것은.
말했지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락이란 모두 유현상처럼 부르는 것이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가슴 저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소리를 머리 위로 꿰뚫듯 치켜 올려 부르는 것으로. 그 기준에서 김종서는 락커였지만 이승철은 아니었다. 그만큼 백두산의 존재감은 언젠가도 말했던 것처럼 시나위파였던 내게조차 무시할 수 없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백두산이 딱 앨범을 세 장만 더 내고... 하긴 그러자면 들국화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아무튼 언제 들어도 절로 머리가 흔들어지는 노래다. 귀로 듣기 전에 자연스레 몸이 반응한다. 김도균의 손가락을 어느새 따라하며, 유현상의 샤우팅을 쫓으며. 한국 메탈의 원점. 어쩌면.
그러나 그런 백두산도 콘서트를 해서 흑자를 기록한 것이 50만원. 물론 그조차도 못 벌고 적자를 보면서 공연을 하는 밴드도 엄청 많다. 그러나 백두산의 이름값에 비한다면 이는 얼마나 참담한 기록인가. 김태원 예능에 출연하기 전, 시나위의 가장 최근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유현상이 돈 떨어지니 돈 벌려 백두산 한다는 말은 얼마나 현실을 모르는 무지한 소리인가. 우리나라에서 돈벌려면 밴드 해서는 안 된다.
사계절 - Four Season 시절의 사진이다. 가장 왼쪽이 윤시내, 그 옆이 젊은 시절의 유현상, 그 옆에 지긋한 아저씨가 신병하. 유현상의 음악스승이랄 수 있는 사람이다. 참 풋풋하던 시절이다.
언제고 윤시내에 대해서도 써보고 싶다. 진짜 희한하게 노래 부르던 보컬이었다. 남자 가운데 조용필이 있다면, 여자 가운데서는 윤시내가 있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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