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 김광석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살아온 저푸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 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에
서툰 백묵글씨로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가사 출처 : Daum뮤직
해마다 4월과 5월이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
얼마나 목말라 했던가. 사실 민주주의가 무언지도 잘 몰랐었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자신들도 그래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권위적이었고 폭력적이었고 당파적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한 가지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분노였다. 당연한 의분이었다. 옳지 않은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어쩌면 나이어린 젊음만이 갖는 어떤 치기였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세상에 타협해버린 기성세대와는 달리 끝끝내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섰다. 나서서 사웠다.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되고, 백골단에 두들겨 맞아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어도, 최루탄에 눈물을 쏟으며 기침을 콜록이면서도, 어느새 수배자가 되어 경찰에 쫓기면서도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 오로지 그 한 마디를 위해.
"민주주의여 만세!"
거슬러 올라가면 민족대표를 자처하던 서른 세 명이 태화관에서 일본경찰에 자수하던 사이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있었다. 광주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광주학생의거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 이땅에 위대한 꿈틀거림이 있었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불합리와 보조리에 대한 분노가, 젊은 영혼의 순수함과 만나 뜨겁게 분출된 것이었다.
시작은 대광고 고등학생들의 행진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서울대생들이 따랐고, 고려대,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 홍익대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어느새 광화문광장에는 10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의 가슴은 그동안의 자유당 독재로 말미암은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불의에 대한 분노로 그들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날 186명이라는 아까운 목숨이 경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만도 무려 6천 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한 분노는 마침내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불완전하지만 마침내 처음으로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순간이었다. 순수한 혁명이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그러나 겨우 1년을 버티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긴 악몽의 순간이었다. 짧은 봄날에 이은 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겨울 속에 사람들은 분노하는 법을 잊고, 행동하는 법을 잊었으며 현실에 길들여져갔다. 87년 6월의 그날까지, 그리고 지금도.
물론 나는 그 세대가 아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6.29선언이 있고 난 뒤였다. 그러나 여전히 선배들은 비장했고, 동기들은 울분에 차 있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설처럼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순수한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를. 그 꿈들의 이야기를. 그 목마름을. 그 뜨거운 목마름을. 그 외침을. 그러고 보니 선배 가운데 그렇게 개처럼 끌려가던 이가 있었다. 매캐한 최루탄 내음 너머로 그 비참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희미해지는 법이라, 이제는 그조차 잊혀져가는 것 같다. 가끔 느낀다. 아니 아주 자주 느낀다. 어느새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러워하는 또다른 젊음들을. 그리도 갈망하던 자유를! 인권을! 그리도 성가셔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을 보고야 만다.
"민주주의따위 개에게나 던져주라!"
선거날 투표하지 않는 것을 현명함이라. 쿨함이라.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가치를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켜져야 할 당위에 대해서도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단지 감정의 배설일 뿐이다. 보편적인 가치란 내게 편리한 어떤 것일 뿐이다. 하긴 그조차도 민주주의의 결과일 테지만.
누구도 분노하지 않고 누구도 행동하려 하지 않는 현실에 깨닫는다. 그저 소수의 사람들만이 목말라해서는 되는 것이 없음을. 홀로 분노하여 이끌려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당시 어쩌면 치기에 젊음을 바쳤던 이들의 노력은 어쩌면 허튼 것이었음을. 지금을 돌이켜 보며. 지금의 현재를 돌이켜 보며.
지금이야 노망난 늙은이 쯤으로 여겨지지만 김지하라면 한때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서며 한 번 쯤 가슴에 품었던 시인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외우며 그 피끓는 목마름을 되뇌었던가. 지금에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과거조차 부정하는 노추가 되어 버렸지만.
이 노래의 원작이 되는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다. 사람은 가도 시는 남는 것이라. 사람은 그리 가버렸어도 그의 시는 여전히 남아 식어버린 불꽃을 되살리려 한다. 오늘에. 4월 19일을 맞아.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비록 완결은 되지 못했어도. 모든 것이 미숙하고 미완이었어도. 미숙하고 미완이어서 마침내 모든 것이 다시 되돌아가고 있어도. 그러나 오늘 하루쯤은 기억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그 시절 오로지 한 가지 분노에 몸을 맡기고 거리로 나섰던 이들에 대해. 그들의 젊은 영혼에 대해.
외친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간은 여전히 이렇게까지밖에 흐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밤은 깊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종일 이 노래다. 벌써 4월이다. 바람은 여전히 이리도 차고 어두운데. 봄은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왔는데 문득 시린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김광석의 절절이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더욱 그리워지는. 그가 떠난지도 이렇게나 오래되었구나. 이 노래는 그의 목소리가 어울린다.
노래를 듣는다. 오늘 하루. 그의 노래를. 그의 기억을 담아. 내 기억을 담아. 아직 4월이다.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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