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문득 떠올려 보는 아이디어, 죽음에 대해서...

까칠부 2010. 4. 26. 13:48

현대인에게 죽음이란 너무 멀다. 마치 내 일이 아닌 듯. 남의 일인 양. 현실에 없는 것처럼 많이들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예로부터 그래서 죽음은 항상 사람들의 곁에 가까이에 있었다. 죽는 것이 당연했고 그래서 굳이 죽음을 거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호상이라는 말도 있는 것 아닌가. 상은 상인데 좋은 상이다. 좋게 죽는 것도 복 받았다 그런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그러셨다. 전날까지 멀쩡하셨다. 그러다 그날밤 갑자기 숨을 몰아쉬더니 그만 운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아마 지금이라면 심폐소생술이라도 해보았을 테지만, 죽음에 이른 이들의 공통된 반응 - 심호흡과 무호흡이 교차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보아 - 나중에 들은 내용으로 추측해 보는 것이다. - 아마 이미 늦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만 아직 칠순도 되기 전이셨는데.

 

호상이라고들 그랬다. 오래 앓지도 않고 고통없이 편안히 가셨다고. 일가친척들이 모여 가신 이를 이야기하고 홀로 남은 외할머니를 위로하고, 그렇게 죽은 이를 떠나보냈다.

 

문득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찮게 본 다큐멘터리였다. 인간의 죽음에 대해 다루는데 홀연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두려웠고 무서웠고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아마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원초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편안함도 느꼈다. 인간은 저렇게 가는구나. 죽음이란 저런 것이구나. 조금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직 갈 날은 많이 남았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앞일은 모르는 것이니.

 

그렇지 않아도 불행한 일이 있었다. 아까운 목숨이 많이도 세상을 떠났다. 사회는 우울하고 사람들은 무겁다. 무언가 짓눌린 것 같다. 죽음이란 과연 그렇게 두렵고 부정하기만 한 것인가.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남자의 자격에서 죽음을 한 번 다루어 보면 어떨까. 작년 눈물편처럼 죽음을 가지고 한 번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학자도 아닌, 의사도 아닌, 어떤 종교인이거나 대단한 철학자도 아닌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연륜을 담아서.

 

포맷은 모르겠다. 먼저 떠올린 것이 과거 명랑히어로의 두 번 살다. 그러나 그건 좀 그렇고, 자기 장례식을 준비해 보면 어떨까? 하나하나 지난날을 정리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남은 이들은 그것을 거들고. 약간의 웃음도 있겠지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다른 아이디어도 있는데 이건 자칫 국민정서에 저촉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한 사람씩 죽은 이를 찾아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어 볼 수 있겠고. 누군가 기일을 맞았다면 - 누군가의 친구이거나 혹은 선배이거나, 스승이거나, 지인이거나, 가족이거나,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어 볼 수 있겠고.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알게 된다면 그만큼 조금은 더 죽음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죽은 이를 웃으며 떠나보내고, 떠나는 이도 평화롭게 떠날 수 있고.

 

아마 모든 예능 가운데 남자의 자격만이 할 수 있으리라. 평균나이 40.6세. 불혹에 접어든 그들의 연륜으로서만이. 한 번 쯤 해볼만한 과제가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확실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남자의 자격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내가 어지간히 남자의 자격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그나저나 과연 남자의 자격 관계자가 이 글을 읽을까? 별로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또 상관없지 않은가? 결국은 쓰고 싶어 쓰는 것일 뿐. 되더라도 그만. 아니더라도 그만. 되었으면...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