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주머니들과 어울릴 일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까지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다.
"아주 얄미워 죽겠다니까!"
"어쩜 인간이 그렇게 치사스러울까!"
하여튼 드라마 이야기만으로 한나절은 후딱 지나갔다. 한 사람 아주 못된 막장으로 만들며.
원래 비극이 갖는 의미가 그랬다. 비극이란 대개 사회적인 부조리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다. 개인적인 문제라면 당연히 개인이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개인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면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더 큰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물론 모든 비극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비극에서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드는 그것은 보다 거대한 사회적 모순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모두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악역들이었다. 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한 몸에 짊어지고 대중의 분노 앞에 처절하게 산화하는 순교자와 같은. 악역이 있음으로써 사람은 감정을 발산할 대상을 찾고 그에 자신의 슬픔과 분노와 증오와 원망 등의 감정을 투사한다.
이른바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이다. 슬퍼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증오함으로써 감정의 극치를 경험하고 그로써 현실에서의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비극에 그것을 동정하면서도 그것으로써 위안을 삼고, 비록 간접적이지만 한껏 감정을 발산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얻는다. 그게 카타르시스다.
다만 문제라면 원래 비극이란 사회가 어느 정도 역동적일 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역동적이어서 그같은 모순들을 - 그로 인한 비극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극이란 사회로 수용된다. 오히려 사회가 경직되거나 정체되면 비극은 말 그대로 신파로 흐르고 만다.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그저 쥐어짜는 눈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니면 허황된 내용들로써 현실을 도피하려 들기도 하고. 비극이 보여주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와 그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기란 너무 힘드니까.
문득 느낀 부분이다. 왜 그리 막장막장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보는가. 드라마를 보면서 욕하고 비난하는가. 욕하고 비난하면서도 또 드라마를 보는가. 그리 드라마의 이야기에,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며 분개하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보았다.
배설이었다. 쌓인 게 많다. 불만도 많다. 왜곡된 감정이 차곡차곡 더깨처럼 가슴 언저리에 두껍게 쌓여 있다. 그것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어떻게?
비극을 감당하기에는 사회 자체가 너무 가라앉아 있다. 활기를 잃고 역동성도 잃은 채 어느새 정체되어 말라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가슴에 쌓인 것은 많고 그것을 해소할 곳을 바란다. 그런때 보여지는 것이 어쩌면 막장드라마가 아닌가.
아니 대부분의 막장이라 불리우는 프로그램들이 그렇다. 아주 직접적으로 말초를 건드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감정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이런 나쁜 놈!"
어느 연예인이 자기가 과거 당한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로 출동하여 그 당사자를 밝히려는 노력들처럼. 과연 그럴 이유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증오다. 미워하는 것이다. 화내고 미워하고 조롱하고 비웃고 괴롭히고... 뒤틀린 감정을 그리로 배설하려는 것이다. 인터넷상을 떠도는 마녀사냥이라는 유령이 바로 그것이다. 작은 잘못이더라도 결코 놓치지 않고 상대를 완번히 부술 때까지 달려드는 하이에나 근성이란. 그에 비하면 차라리 아주머니들의 수다는 남들 험담이나 하고 마는 정도라는 게 다행이랄까?
그만큼 여유가 없이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억눌리고 뒤틀리고 갈 곳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요 몇 년 제대로 비극을 참고 본 적이 없었다. 비극을 감당하기에는 나 또한 여유가 없으므로. 그래서 차라리 막장을 보면서 욕이라도 하겠다... 혹은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 한 인간을 막다른 지경까지 몰아가는 악플러들까지. 혹은 읽는 모두를 모욕하려드는 그 악의들까지도.
가끔 보면 대중문화란 그 사회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그 사회의 대중이므로. 대중이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그 까닭에 답이 있지 않은가.
세상에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막장이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기에 만들어진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기에 수요가 있고 소득이 있다. 그래서 만든다. 과연 그 수요와 소득이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왜 막장인가는 그곳에 답이 있지 않을까. 세상이 이미 막장이다.
아무튼 참 흥미로운 시간들이었다. 전혀 모르는 드라마에, 전혀 모르는 이야기들에, 그러나 그리 진지하던 아주머니들의 모습이란 것이. 바로 우리네의 일상이다. 가감없이 드러나는. 의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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