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이 도망치려는 것을 소하가 쫓아가 데리고 오니 유방이 물었다.
"그동안 도망친 장수가 한둘이 아닌데 어찌 한신만은 유독 쫓아가 데려왔는가?"
그러자 소하가 대답했다.
"천하를 도모하자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유방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를 보아 한신을 대장으로 삼겠다."
그러나 오히려 소하는 정색하며 유방을 말리고 있었다.
"대왕께서는 너무 오만하십니다. 대장을 쓰시려 하시면서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십니다. 그러니 한신과 같은 이가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신을 대장으로 삼으시려거든 먼저 좋은 날을 받아 목욕재계를 한 연후에 단을 쌓고 예를 갖추어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원래가 그렇다.
"너 대장 해!"
그러면 바로 다음 말이 이어질 수 있다.
"너 하지 마!"
그냥 아무렇게나 임명한 대장이야 아무렇게나 해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모두의 앞에서 천지신명께 고하기까지 한 대장이라면 아무래도 그러기에는 마음에 거리낌이 생긴다. 무엇보다 다른 대신이며 장수며 병사들 역시 대장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그에 복종하게 된다.
사실 모든 게 마찬가지다. 천 만 원 주고 산 물건과 1만 원 주고 산 물건과 어느 쪽을 더 아끼고 잘 쓰게 될까? 연봉 1억짜리를 연봉 1천만원짜리보다 더 부지런히 부려야 하겠짐만 현실은 연봉 1천만원짜리는 온갖 허드렛일을 다 맡아 하더라도 연봉 1억짜리는 괜한 다른 일 하려 하면 오히려 주위에서 말린다.
이 드라마를 보겠다. 애써 약속도 잡지 않고, 부지런히 일도 제 시간 안에 마무리짓고 해서 드라마 시간에 맞춰 TV앞에 앉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자기 할 거 다 하고 이제는 드라마라도 볼까 하며 P2P사이트에서 다운로드받아 대충 앉아 보는 사람이 있다. 과연 누가 보는 드라마가 더 재미있을까?
어차피 드라마는 같다. 그러나 이미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전자는 이미 나는 이것을 보겠다 마음먹은 뒤다. 그래서 이미 많은 것을 그를 위해 양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드라마에는 이만한 가치가 있다... 즉 나의 일상을 일정부분 포기하더라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드라마다. 그에 비해 후자는 자기 할 것 다 하고 시간이 나면 잠시 보기는 하겠다... 즉 보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 실제 후자의 경우 드라마를 보면서 아마 가장 많이 쓰는 것이 오른쪽 방향키일 것이다. 5초씩 프레임 당겨보기. 성가시면 건너뛰고 귀찮으면 지나치고, 그러다 뭔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바로 삭제... 재미있을까?
인터넷에서 아무렇게나 다운로드받아 보는 영화와 어떤 영화인가 이리저리 알아보고, 극장이며 상영시간도 살피고,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내 돈 주고 표를 구해서 2시간 넘는 시간은 꼼짝도 않고 앉아서 보는 영화와 과연 같겠는가 말이다. 아무때고 지겨우면 멈추고, 다른 볼 일 있으면 멈췄다 다시 보고, 보지 못한 게 있으면 다시 돌려 보고, 재미없다 싶으면 건너뛰고, 그러나 극장에 앉아 있으면 2시간 남짓한 시간동은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전제하고 극장에 가는 것이다. 자기 시간과 자기 노력과 자기 돈을 들여서. 영화는 극장에 가서 봐야 한다는 것은 극장이라는 장소가 갖는 하드웨어도 하드웨어지만 그같은 준비과정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뭐든 그렇다.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받은 게임... 재미없으면 지워버리면 된다. 그런데 제 값 주고 두근거리며 사 온 게임... 재미없어도 끝까지 붙잡고 앉아 본전을 뽑으려 든다. 사실 그런 식으로 게임을 하게 되면 어지간히 망작이 아닌 다음에는 재미없는 게임이 드물다. 최소한 개발자는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내놓은 게임일 테니까. 더 재미있거나 혹은 덜 재미있거나...
결국은 뭐냐면 동의다. 재미의 전제는 항상 동의다.
문화란 소통이다. 창작자와 대중이 어떤 창작물을 매개로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이란 동의를 전제한다. 간단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려 하면 어떻게 될까? 상대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고 - 혹은 내가 듣고 싶은대로 듣고 내 이야기만 하려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창작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대중이 아예 귀를 막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재미있을 리 없다. 이런저런 다양한 장치들을 만들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데 그 가운데 뚝 떼어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면 더 이상 그것을 보는 의미란 사라진다. 그래서 대화에서도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상체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여 듣기. 이를테면 본방을 사수하는 것이나, 극장을 찾는 것이나 그를 위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는 분노도 커진다. 공짜로 보는 영화야 망하거나 말거나. 그러나 내 돈 내고 내 시간 들여 보는 영화가 그 모양이면 그 분노란 그 이상이다. 분노할 수 있다는 것도 결국 소통의 증거다.
흔히 말한다.
"요즘은 볼만한 영화가 없어."
대개는 공짜로 영화를 다운로드받아보는 사람들이다.
"요즘 드라마는 다 거기서 거기야."
거의 비슷하다.
"요즘 음악들인 다 그래."
그러나 직접 내 돈 주고 시디를 사서 부클릿 뒤적이며 듣는 음악이란 전혀 다르다. 참여한 세션의 이름이라든가, 혹은 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무엇보다 손에 느껴지는 음악의 촉감이라는 것은 어지간히 망한 음악이 아니면 한결 좋은 소리를 들려주게 된다. mp3의 음질이 아무리 좋아져도 시디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시디 역시 아무리 해도 과거 엘피시절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물론 그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한 달 용돈을 모아 큰맘먹고 사들이던 어린 시절의 카세트테이프였지만.
확실히 시디를 사더라도 전과 같지 않음을 느낀다. 고작 테이프 하나... 그러나 그게 그리 신기하고 설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가. 1만 3천원, 혹은 1만 5천원... 술 한 번 먹기에도 아쉬운 돈이다.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저 돈 없어서 어쩌지는 않는다. 그만큼 음악을 듣는 무게도 가벼워졌다는 것인데...
아마 많이들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찌해야 재미있는가를.
본방사수라는 게 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나도 그저 갖다 쓰고 있는 입장이다. 반드시 본방사수를 하겠다... 그리고 그 뜻은 이건 본방을 챙겨볼만한 가치가 있다. 더 나아가 본방을 챙겨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만한 가치가 여기에는 있다. 그러니 당연히 본방을 챙겨보고 그리고 더 집중하고 그래서 더 재미있어 한다.
사실 공짜로 다운로드받아 즐기는 사람들은 조금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재미를 모른다. 억지로 극장에 들어가 앉아 2시간을 꼼짝도 않고 스크린에만 집중해야 하는 재미를. 술약속도 미룬 채 다른 일 다 접고 시간만 되면 TV앞에 앉는 그 즐거움을. 배송되어 온 시디를 집어들고 트레이에 넣기 전에 들어보고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부클릿을 뒤적여보는 그 설레임을. 그보다는 매장에서 직접 게임을 골라 사들고 돌아오며 엄한 매뉴얼만 미리 꺼내서 벌써부터 게임에 대한 상상을 키우던 그 두근거림들을. 그러니 그들의 일상이란 재미있을 리 있나.
그래서 하는 말이란,
"이것도 재미없고, 저것도 재미없고, 다 재미없고..."
남는 것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투덜거림 뿐. 그러나 그러기에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나더라는 거다. 단지 그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뿐이다.
흔히 그러지.
"세상에는 좋은 음악과 더 좋은 음악이 있다."
게임에도 재미있는 게임과 더 재미있는 게임이 있다. 드라마든 영화든 뭐든 다 그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투자자도 붙고 해서 만들어지는 거다. 그로부터 얼마나 재미를 느끼는가는 결국 자기 하기 나름.
그러나 말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디에나 도저히 봐주지 못할 것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냥저냥한 채라면 한 번 투덜거리고 말겠는데, 그래서 그런 경우는 진심으로 화내게 된다. 동의하여 그것을 대한 만큼 그 분노는 진심이 된다. 여느 악플러의 투덜거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현재 내가 본방을 사수하는 프로그램은 남자의 자격 하나. 무릎팍도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탓에 라디오스타는 조금 사수율이 떨어진다. 그래서 더 남자의 자격이 재미있음을 느낀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는 며칠 전부터 기사도 찾아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이런저런 상상을 부풀리고, 프로그램이 시작하고서는 그런 기대와는 별개로 보여지는 모든 것에 감탄하고,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는 끝난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주를 기대하게 된다. 일상이 그래서 남자의 자격 하나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
남자의 자격이 재미있는 이유란 남자의 자격이 재미있어서도 있지만 그것을 기다리고 즐거워하고 다시 아쉬워하는 그 마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 바로 다음 권을 보고 싶어지는 만화책처럼. 다음에 발매될 날을 기다리며 몇 번을 반복해 읽는 그 마음처럼 말이다.
삶이란 의외로 재미있는 것이다. 설레임만 있다면. 두근거림만 남아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물론 그것은 충분한 댓가를 지불했을 때의 일일 테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다시 말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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