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분노와 증오...

까칠부 2010. 7. 7. 12:19

흔히 혼동하는 부분이다. 무려 논객을 자처하고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마저 가끔 헷갈려하더라.

 

분노란 특정한 사실에 대한 것이다. 특정한 행위에 대해 한정하여 나타난다. 당연히 그 사실이 바로잡혔을 때 분노는 함께 사라진다.

 

간단히 자식이 무언가 잘못했을 때 부모의 반응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분명 화를 낸다. 화를 내지만 잘못했다 용서를 빌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 다짐을 했을 때 이내 풀어지며 다시 사랑으로 자식을 대하게 된다.

 

분노란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해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하고 있다고 하는 인지로부터 출발하여 그를 바로잡고자 하는 지극히 이타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애정하고 존중하기에 분노할 수 있는 것이며 분노는 이내 문제가 바로잡혔을 때 용서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증오란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유는 있다. 그러나 증오가 있고 나면 이유란 필요없다. 의심과도 같다. 아니 같은 것이다. 이유가 없다면 의심을 통해서라도 이유를 만들어내니까.

 

잘못했다고 빌어도 소용없다. 모든 것을 바로잡고 새로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도 소용없다. 차라리 나가 죽어버리라. 아니 심지어 실제로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다. 같이 숨쉬는 것도 싫다.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도 싫다. 따로 예로 들 것도 없다. 일상에서 많이 보는 모습이니.

 

다만 자칫 분노와 증오가 혼동되는 것은 증오의 발단 가운데 증오가 포함되는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처음에는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도 치고 용서도 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식이 차라리 웬수가 된다. 보는 것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다. 야단도 더 이상 치지 않는다. 관심조차 두지 않고 아예 자신의 기억과 인지에서 그 존재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차이라면 어떤 부모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자식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단치고 타이르고, 지칠 법도 하건만 마지막까지 마음을 잡고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노력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김길태의 양부모의 모습이 그랬다. 주워 기른 자식이건만 그리 큰 죄를 저지르고서도 여전히 자식이라고 대중 앞에 용서를 비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부모의 모습이다. 내가 김길태를 더욱 용서 못하는 이유다. 저리 훌륭한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

 

분노가 이타에 의해 일어난다면 증오는 이기에 의해 일어난다. 자기는 옳다. 자기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할 것 다 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자식 책임이다. 그러면 자식을 증오하게 된다. 반면 아직도 다 못해준 것이 있다면 그래도 미련을 거두지 않고 자식을 대한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옳다. 나에게는 한 점 작은 오류도 없다. 내게는 어떤 잘못도 잘못의 가능성도 없다. 가능성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런 완고한 에고가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 못하게 한다. 다른 이의 문제들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심지어 상대의 잘못이 바로잡혔을 때조차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상대란 이미 그런 사람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에 엄격하고 타인에 관대한 사람이 하는 것이 분노라면 자기에 관대하고 상대에 엄격한 것이 증오라 할 것이다. 관대하기에 엄격한 것과 엄격하기에 무관심한 것과의 차이일까? 증오란 또한 그래서 상대에게 그렇게 무관심하다. 그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상관없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떻게 되었든.

 

완고하다는 것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결론내려졌다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수정의 여지는 없다. 그것은 정의이며 진리다. 그런데 무슨 새로운 관심이 필요할까. 무슨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할까.

 

그래서 증오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정의롭다. 증오를 말할수록 그들은 한 점 티끌없이 정의로워진다. 그들의 정의에는 작은 의심조차 없다. 그들은 정의롭기에 정의로우며, 정의롭기 때문에 정의롭다. 그들의 정의는 정의로써 완성된다. 관용이나 용서란 있을 수 없이. 그런 것은 비겁한 타협에 불과하다.

 

"죽여버려!"

 

유대인을 학살하던 독일군도 지극히 정의로웠다. 제주도에서 동족을 학살하던 이들도 그리 정의로웠다. 보도연맹을 학살하던 이들은 아닐까?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던 군인들도, 그들에 명령을 내리던 이들도 정의로웠다. 단지 그들은 자신의 정의를 믿었으며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더불어 상대에 대해 전혀 조금도 알려 하지 않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단지 그 뿐.

 

물론 분노할 줄 아는 이도 정의롭다. 다만 그의 정의는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자기를 강요하기보다 타인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것이며 따라서 한시적이며 한정적이다. 때로는 타협하듯 관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증오하는 사람도 정의롭다. 단지 그들의 정의란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가 아니다. 바로 이끌고자 하는 정의도 아니다. 단지 확인일 뿐이다. 자신의 정의에 대한 단순한 확인에 불과하다. 상대를 파괴함으로써, 악으로 단정지은 대사을 파괴하고 모욕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싶을 뿐이다.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없이 오롯한 자기 자신만의 정의를 과시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증오에는 시한도 한정도 없다. 욕구가 있는 한 욕망이 있는 한 무한히 확장되고 계속된다.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증오하는 자신이 있는 한 그것은 결코 멈추지도 그치지도 않는다. 미워할 것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미워해야 하고, 증오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증오해야 하고, 말했듯 숨쉬는 것조차 이유가 될 수 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빌미가 될 수 있다. 아니 죽어서도 죽은 그 자체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 영혼이 있다면 죽고서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즉 증오란 다시 말해 정신병이다. 한 마디로 미쳐버린 것이다. 컴퓨터의 바이러스와도 같다.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컴퓨터는 제대로 정상적인 연산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다. 증오에 사로잡히면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는다. 사고가 되지 않는다. 인지도 되지 않는다. 증오할 뿐. 스스로 통제조차 안 된다. 한 번 증오에 빠지면 이미 그것은 자기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노는 드러나는 것이고 증오는 숨은 것이기에. 분노는 화를 냄으로써 드러내지만 증오는 항상 정의를 앞세우기에. 오히려 분노에 더 엄격하면서 증오에는 관대한 우리 사회랄까? 분노에 대해서는 단호하면서도 증오에 대해서는 온정과 이해를 아끼지 않는다. 오히려 동조한다. 온건하면서도 정의로 포장한 증오에 스스로 동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분노에는 그리 엄격하면서도.

 

우리 사회에 어느새 증오가 넘쳐나는 이유일 것이다. 관용해야 할 것을 관용하지 않고 관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용하고 있으니. 덕분에 나는 그 썩은 악취로 매일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분노란 옳다. 그것이 분노인 동안에는 언젠가는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니. 스스로 잘못을 깨닫거나, 혹은 그 원인이 되었던 문제가 바로잡히거나. 무엇보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증오는 그 무엇도 바로잡지 못하고 그저 파괴할 뿐이다. 그 무엇도 정상으로 되돌리지 못하고 상대를 파괴하거나 자기가 파괴될 뿐이다. 갈 곳을 잃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그 끝 모르는 악의란. 부끄러움도 모르고 삼갈줄도 모르는 그 주체할 줄 모르는 오만과 이기라는 것은.

 

그리고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혹은 무시한 채 오늘도 용인하려 드는 사람들이란. 사회란. 그런 이들이 저지르는 패악에 한없이 관대하기만 한 무책임한 관용과 선의라는 것은. 무엇보다 그런 악의마저 권장하려드는 어떤 정의들에 대해서는. 도대체가...

 

하여튼 그래서 오늘도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하다. 한용운 선생이 그랬지.

 

"세상에 가장 더러운 게 송장 썩는 냄새고 그보다 더 더러운 게 네놈들 머리 썩는 냄새다."

 

시체 썩은 내는 맡아봤는데... 역시 머리썩는 내 만큼은 아닌 것 같다. 건강에 안 좋다. 만수무강해야 하는데...

 

나는 생각없는 놈들이 세상에서 젤루 싫다. 생각없이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