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내 배를 갈라 보여줄 수 있으면 보여주겠다!"
부당한 오해나 의심을 샀을 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 가운데 하나다.
그리 억울해 한다. 그리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자식이 음식을 훔쳐먹었다는 의심을 받자 그 배를 갈라 결백을 입증하고 자신도 따라죽은 부모의 이야기가 일본과 중국에 전해지고 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바로 그런 무책임안 의혹제기와 비난으로 인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작년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쪽 지지자들이 이번 사건에서 타블로에게 같은 식으로 공격을 가한 것이 같잖은 이유인데.
부당한 오해나 의심을 샀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백을 주장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적지 않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오해란, 의심이란 그리 고통스럽더라는 것이다.
사람은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관계란 신뢰를 전제한다.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 소통인데 소통의 기본이 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믿음 - 동의다.
사람들이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그 소통의 부재다. 전혀 내 이야기를 들러주지 않는다는 것. 전혀 내 이야기를 들르려고도 않고 들어주려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다. 고립감과 더불어 자기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갖게 된다. 그래서 죽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죽음이란 때로 자기를 알리기 위한 마지막 소통의 시도인 셈이다. 죽음만큼 강렬한 것도 없기에. 죽음이라는 다시 없을 강력한 충격을 통해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들으라 하는 것이다.
단지 의심하는 것 뿐인데 그것이 어찌 폭력인가. 참 어이가 없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있어서 전혀 부당한 일로, 아니 설사 그것이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반복해서 의심하며 전혀 믿으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과연 그것이 정당한 의심이니 아무런 상처도 아픔도 없을까? 실제 그럴만한 일이 있거아 결백하거나 그러니까 전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그렇게 무작정 의심만 한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가.
타블로의 경우가 그랬다. 보통의 경우 졸업장만 보여주면 더 이상 의심하거나 묻지 않는다. 그래서 도저히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보여줬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스탠포드 대학 차원에서의 인증이라는 것도 너무 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고 가능성도 거의 없는 동명이인설을 주장하며 여전히 의심만 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동안도 해명된 부분이 많다. 논문에 대해서는 논문이 아닌 소논문 - 페이퍼였다. SAT의 경우도 단지 수사적 표현으로 보지 않았다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외에도 기타등등. 아니 무엇보다 NSC에서 졸업증명서를 떼는데 이제 와서 졸업증명서 안 보여줬다고 그것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졸업증명서가 먼저였다. 그 다음에 성적증명서였다.
전혀 들으려 않는 것이다. 전혀 타블로가 하는 말에 대해 들으려고도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심리의 근간에는 그것이 있었겠지.
"캐나디언"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
즉 너는 우리와 동류가 아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어떠한 신뢰와 존중도 없다. 들어줄 가치도 없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주장만. 그저 의심만. 그리고는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래서 법적대응을 한다면 법적대응을 한다고, 법적대응을 하지 않으면 또 법적대응을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결론지어지는 것이다. 타블로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안에서. 타블로란 전혀 있지도 않은 채.
배제다. 앞서 말한 소통의 거부. 동의의 거부이며 신뢰의 거부다. 존재의 거부다.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겠다. 나는 너를 동류로써 받아들이지 않겠다. 만일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써 존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최소한 타블로가 뭔 소리를 하는가 들으려고는 했을 테지. 그러지 않았다는 자체가. 과연 하나의 존재를 완전히 거부하는 이상의 폭력이란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의심을 하고서는 그 의심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심을 했어도 상대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있으면 일단 들으려 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하니 자기 안에서 결론을 내리고 확정하여 비난을 퍼부어댔던 것이다.
정당한 의혹제기였다. 정당한 비판이었다. 그러자면 먼저 단지 의혹만으로 사실로 확정하여 비난을 퍼부어대던 이들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연 정당한 의혹제기였는가.
더불어 단지 의심만 했다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타블로가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였는가. 자기가 믿고 싶은 바만을 듣고 믿고 타블로라고 하는 한 인간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려고만 들지 않았는가.
아니 타블로의 경우만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쉽게 범하는 잘못이다. 타블로는 그런 한 예일 뿐이다.
"의심할만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 전에 믿을만한 근거는 없는가. 의심할만한 근거가 있다면 믿을만한 근거도 어딘가는 있겠지. 그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학교에서 선생으로부터 부당한 의심을 받고 벌을 받았을 때 그 기분이 어떠하던가. 물론 선생은 말하겠지.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다. 부모로부터도 전혀 부당하게 의심을 받고 야단을 들었을 때는 또 어떠하던가. 부모라고 아무 근거 없이 의심하고 야단쳤을까. 친구 사이에서는? 그래서 한 번의 잘못된 의심으로 평생을 비뚤어진 녀석들을 많이 보았었다.
동의란 너를 인정하겠다는 선언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를 존중하겠다고 하는 표현이다. 너는 나의 학생이며, 너는 나의 자식이며, 너는 나의 친구이며, 같은 무리를 이루는 구성원이라고. 그런데도 전혀 동의하지도 믿음을 갖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단지 의심할만하다 해서 의심하는 것은 그를 더 이상 믿지 않겠다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에 불과하다. 너는 나와 동류가 아니다. 너는 거부되어야 하고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으로 내모는가. 무리를 이루어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있어 그 관계가 단절되고 소통이 단절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며 절망이겠는가.
그게 착각이다. 의심은 폭력이 아니다. 단지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의심한다. 그렇게 쉽게 의심하고 단정한다.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 여긴다. 그리고는 그리 거부당하고 부정당한 끝에 절망하고 좌절한 이들에 대해 손가락질한다. 학교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붱당한 아이들에 대해 네가 그러니 그런 것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심으로 인해 스스로를 죽여나가고 있을까. 실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만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지운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무책임한 것이다. 그저 의심하는 것 뿐이니까.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욕설을 하는 것도 아닌 단지 의심하는 것 뿐이니까. 그렇게 무리로부터 거부하고 내몰고. 그러고서는 나는 아무 잘못도 아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확실히 가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렇게 쉽게 아이들을 의심하니까. 선생들도 그렇게 아이들을 의심하니까. 의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리 눈치를 보며 맞춰가고. 어느샌가 획일화되어가는 사회란 그 한 단면이 아닐까.
단지 근거가 있어 의심했을 뿐인데 그것이 뭔 잘못인가. 의심 자체가 잘못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는 게 잘못이다. 듣지 않으려 한 것이. 무작정 거부하고 부정하려고만 한 것이.
많은 것을 생각케 된다. 사실 타블로 전까지만 해도 어렴풋이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름 반면교사가 되었달까?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 되겠다. 이번에 내가 얻은 깨달음일 것이다.
더불어 이번 기회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타블로도 확실하게 대상자들에 책임을 묻도록. 아무 생각없는 의심에 또 다시 고통을 받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대하는 바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반드시 배를 갈라 보여주어야 믿겠다. 그것도 병이다. 소통부재의. 가엾은 주제들인 것이다. 한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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