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실버합창단과 눈물을 흘리고 마는 이유...

까칠부 2010. 9. 20. 19:09

항상 말한다.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르느냐보다는 누가 부르느냐. 그렇지 않은가? 아이유가 실연의 아픔을 담은 노래를 해봐야 그것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들릴까? 반면 노사연이 마쉬멜로우를 부르면 그것도 꽤나 어울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조카녀석이 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들어갔다. 앞에서 활짝 웃으며 노래를 부른다. 물론 그 가운데는 장래 이승철이나 이은미도 있을 것이다. 이선희가 있을 수도 있고 임재범이 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원래 가수보다는 못 부르겠지. 그래도 누구의 노래에 더 감동을 받을까?

 

동의라는 것이다. 동의란 자신을 열어 상대에 다가가는 것이다. 얼마나 자기를 열 수 있는가. 얼마나 상대에 다가갈 수 있는가. 그런 것을 두고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한다. 전혀 남의 일을 두고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 남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얼마나 잘하고 못하고, 그건 그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 어머니가 노래를 못한다고 들려주는 자장가소리가 듣기 싫은가? 아이가 음치라고 해서 생일축하한다고 불러주는 소리가 그리 흉한가? 그 나이가 되어 부르는 "서른즈음에"라면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떠나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자막에도 있었다.

 

"귀여우시다..."

 

누군가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솔직히 나의 경우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누가" 부르는가에 대해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가사도 잘 듣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이런 정도의 노래에도 눈물을 흘리는구나. 남자의 자격 합창단 멤버들이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줄 알았다.

 

하지만 들어 보니 시커먼 사내녀석들도 그리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무대에 서기까지 그 분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가 떠올라서. 다시 들어봤다. 순간 울컥하는 자신이 있었다. 알 수 없이 치밀어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아, 이거구나.

 

결국은 동의라는 것이다. 마법인 것이다. 아마 연출이나 스토리작법을 공부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60대 이상의 노인분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라는 정보가 주어지고, 고작 30cm도 안 되는 계단조차 오르기 힘들다는 모습이 보여지고, 그 순간 사람들은 마법에 빠진 것이었다. 경계를 허물고 그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여러가지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말한 것처럼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고, 이제까지의 남자의 자격 합창단의 모습일 수도 있고. 얼마나 열심히 하셨을까. 얼마나 힘들게 연습들을 하셨을까. 그 열정과 노력들이 보이는 것 같고.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투사다. 경계가 사라지면서 내가 보고자 하는 바를 그 분들에 투사하여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동조 상태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이... 너무 서툴러도 감정의 동조가 깨질 것이고, 너무 능숙해도 어쩐지 순수를 잃은 듯 열기가 식을 것이고... 프로페셔널한 기교보다는 담백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가 마음속에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며 온전히 그 노랫소리를 가슴으로 전달한다.

 

동의가 왜 필요한가? 그것이야 말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벽을 지우고 순수하게 작가가, 아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 느끼는 것이다.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되고, 할머니의 자장가소리가 되고, 무대에 서기까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고... 투사일 것이고,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은 전혀 모르는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이기도 할 테니까.

 

아름다움은 그래서 걸러지지 않고 다가온다. 그분들보다 더 잘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분들보다 더 아름답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허락한 순간 그분들의 목소리는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영혼으로 와 닿아 들리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다. 당연하다. 이유가 없으니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귀엽다 여긴 순간 동의해 버린 것이고, 어머니를 떠올린 순간 그에 자기를 투사한 것이고, 그렇게 경계가 사라지고 들려오는 노랫소리란 전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순수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을까? 다른 사연들이야 그저 이유일 뿐. 그런 이유들조차 상관없이 이미 그렇게 느껴버린 것이다.

 

그분들이 60세 이상 노인들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을 때와, 그분들의 얼굴과 표정 하나, 목소리 하나를 주의깊게 살피고 들었을 때와, 단지 노래만을 들으려 했을 때와, 그것을 부르는 이들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와, 바로 그런 차이랄까? 나도 어머니가 있고 할머니가 있었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어떤 동정이었을까? 어쩌면 슬픔이나 아픔이 있어서였을까? 아니었다. 단지 아름다워서. 단지 그 목소리들이 너무나 서럽도록 아름다워서. 북받친 눈물이었다. 가슴 가득 채워진 그 아름다움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새어나온 눈물이었다. 아름다움이 넘쳐 흐른 그런 눈물이었다.

 

참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었고. 의외로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순수하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나에게도 이런 순수가 남아 있었구나. 그러면서도 그 순간 계산적으로 듣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렇게나 쓸데없이 생각이 많구나. 때가 꼬질꼬질 끼어 이렇게도 받아들이는데 어색하구나.

 

노래를 얼마나 잘하고. 얼마나 노래를 부르는데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감정전달력이 훌륭하고.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아름다워서 음악이란 아름다운 것일 터다. 예술이란 사람이 아름답기에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그것을 전하는 사람도 아름답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름답고.

 

음악이란 결국 소통이다. 이야기다. 그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는가. 그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들려주는 사람만이 아닌 듣는 자신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모니의 마지막 뜻일 것이다. 무대에 선 합창단과 관객석에서 그것을 듣는 이들의 눈물을 통해서. 화면 너머로 그것을 보며 함께 눈물을 짓던 사람들에게서..

 

그분들이 감동을 준 것이 아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사람들에 감동을 주었던 것이 아니다. 감동을 주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감동을 느낀 것은 나 자신. 우리 자신. 우리 내면에 있는 어떤 순수들이. 그런 공감이. 공명이. 단지 그 분들은 노래를 불렀을 뿐. 자신들의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가보다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부르는가보다 무엇을 들었는가. 결국은 무대위에 선 이와 객석에 앉은 이가 서로 마주보고서. 무대는 단지 무대 위에 선 이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가 모두 하모니가 아니겠는가.

 

과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 이유가 있겠는가. 감동 그 자체로 족한 것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떠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 단지 아름답게 불러서가 아니다. 아름답게 들을 수 있어서다. 눈물을 흘릴 수 있었서 당신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말하고 싶었다. 순수야 말로 아름다운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