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
아마 이 말의 의미를 여직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 모양이다.
예를 들어 산적들이 마을을 덮쳐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 그런다.
"아무리 산적이라고 함부로 다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저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글쎄...
왜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는가.
"나는 흑인이 싫어! 그 자식들 보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아!"
"나는 외국인 노동자가 싫어! 그놈들 싹 쓸어다 갖다 버렸으면 좋겠어!"
"외국국적의 한국인들 다 싫어! 나 내쫓았으면 좋겠어!"
여기다 대고 말하지.
"이것도 다양성이다. 허용해야 한다."
하긴 한국사람들은 말로 인해 입는 피해라는 것에 대해 무척 무지한 편이다. 말로 하는 폭력들, 말로 하는 단지 의심들, 그러나 그로 인해 누군가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는가.
저리 말하는 것을 용인하는 순간 그 다른 한 편에서는 다른 누군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회에서 점차 떠밀려나게 되겠지. 증오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그것이 용인되는 순간, 증오의 대상이 된 이들은 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다양성인가?
다양성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그 다양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도를들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싸워야 한다. 다양성을 거부하려는 의도들에 대해서.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되는가? 함부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그렇다면 먼저 당장에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산적을 거부해야 한다. 단지 산적이라고 하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행위' 자체에 대해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 원인이 되는 산적이 해를 입는 것일 뿐.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지켜야 할 가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먼저 다양성이어야 할 테고, 그 다양성은 관용에 의해 지켜질 것이고, 그것을 전제하는 것은 개인과 인권. 그렇다면 배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가 어떻게 하면 악플러마저 관용하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바로 그게 문제다. 결국은 네티즌이란 잠재적인 악플러일 뿐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악플러도 네티즌이다. 악플러도 사람이다.
단지 증오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알라. 단지 무책임한 의혹들이, 말의 칼날들이 사람을 죽이기도 함을 알라. 실제 그렇게 죽었다. 그제였던가? 최진실씨 2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참 이렇게 무책임하다. 아니 무책임하다기보다는 무지하다. 알지 못한다. 몰라서 짓는 죄랄까?
관용이란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할 게 아니다. 다양성을 말하자면.
내가 한국사회에 실망하는 가장 큰 부분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증오를 이야기하는 것.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싫다!"
그 정도를 넘어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바로 증오와 편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떠들 수 있는 그런 무지한 이들.
항상 말하지. 생각없는 놈들이 가장 싫다. 생각없이 똑똑하고 정의로운 놈들이 가장 큰 해악이다.
결코 저들에 관용할 수 없는 이유다. 관대해지 수 없는 이유다.
별 거지같은 것들을 다 본다. 아, 미안. 그래도 거지는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이리 쉽다.
타블로야 말로 그러한 우리 사회의 바닥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그동안 타블로에 가해졌던 폭력들과 그 폭력들에 관용하던 다수와, 이제 와서 다시 관용을 말하는 멍청이들과,
내가 타블로 사건에 관심을 아직까지도 놓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렇게 재미있다. 한심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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