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감정대로 하자면 아예 인터넷에서 다시는 저런 뻘짓을 못하도록 검열과 처벌을 강화했으면 좋겠다. 일단 내가 들어먹은 욕 때문에라도 그런 놈들 싹 쓸어버렸으면...
하지만 항상 내가 전제하는 것이,
"사람은 결국 불완전한 존재다."
다양성이라는 게 그렇다. 왜 다양성이 필요한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미흡하기 때문이다. 어딘가 모자르고 한심한 존재인 때문이다. 왼쪽 팔 없는 사람과 오른쪽 팔 없는 사람과, 오른 다리 없는 사람과 왼 다리 없는 사람과, 다리를 못 쓰는 사람과 앞을 못 보는 사람과,
과연 누가 정답일까? 내가 아는 것이 정답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 아는 것이 정답일가? 아니 굳이 누군가 정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누군가는 40%짜리 정답을, 누군가는 50%짜리 정답을, 누군가는 크게 80%를 넘어갈 수도 있다. 완전 오답인 줄 알았더니 그 가운데 10%의 정답이 았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아이에게도 물으라.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그러나 아이에게도 혹시 정답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이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세 사람이 가면 스승이 있다고 하는 것이고.
항상 옳기만 바란다면 결국은 그 수많은 가능성을 놓치는 것이다. 마치 통일벼와도 같다. 잎마름병으로 절딴나던 시기 감자와도 같다. 감자는 완전식품이었다. 완벽한 식량작물이었다. 최소한의 노력으로도 어디서나 잘 자랐고 병충해에도 강했다. 아일랜드와 독일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감자 덕분에 삶을 영위하고 인구도 늘 수 있었다. 하지만 감자에만 의존했을 때 닫친 감자잎마름병은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통일벼 역시 한국 종묘산업의 쾌거라 할 정도로 강인하며 생산성 좋은 벼품종이었다. 가뭄에도 병충해에도 잘 견뎠으며 밥맛은 조금 그랬지만 생산성이 좋았다. 통일벼를 개발하고서 비로소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도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벼만 심어놓은 논은 이내 통일벼를 공격할 수 있는 병충해에 대해 철저히 무력했고 그해 농사는 처참할 지경이었다.
왜 근친교배가 문제인가. 유전자풀은 다양해야 한다. 보다 다양한 유전자풀을 가지고 있을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당장은 정답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정답이 되는 때가 온다. 그때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역시 도태될 뿐이다.
온갖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또한 다양한 가능성들이 있다. 인터넷이라는 수평네트워크란 바로 그런 공간이다.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 권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피드백하며 정보를, 그리고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마치 네트워크로 연결된 거대한 가상의 뇌와도 같다. 때로 오류도 일으키고, 때로 말썽도 일으키지만 그러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란 장차에 있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오류란 단지 오류일 뿐.
어차피 인간은 실수를 저지른다. 잘못도 저지른다. 거짓말도 하고 폭력도 휘두르고 사고도 친다. 넘어지면서 걷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깨져가면서, 이마가 깨져 우는 횟수만큼 걸음도 늘어난다. 그동안의 희생이야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러한 잘못된 폭력으로 인한 고통들이야 안타깝기 이를 데 없지만 그러함에도 공공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다양성과 그것을 담보할 표현의 자유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분위기를 조성해가면 된다. 학교에서 가르친다. 집안에서 가르친다. 사회에서 가르친다. 그리고 지금도 타진요가 그리 날뒤던 동안에도 그들의 헛점과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던 네티즌들이 있었다. 비록 단 한 사람의 악플러만 있어도 상처를 입고 마는 것이지만, 그런 가능성마저 일률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가 타진요를 그리 욕하고 비난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내가 네티즌을 개티즌이라 하며 조롱하고 비아냥댔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깨달으면 된다. 스스로 바로잡으면 된다. 그것은 외부의 누구더러 바로잡아달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바로잡으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율일 것이다. 스스로 기준을 세워 지키는 것. 반성하고 삼가고 스스로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 그래서 더욱 외부의 개입이 있을 것이 예상되기에 더 욕하고 더 비난하고 더 공격했던 것이다.
빌미가 주어졌다.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져가고 있다. 타블로는 그 빌미에 불과하다. 이전에 이미 최진실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의도와 목적도 분명하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모습들에 어느새 환멸을 느끼고 족쇄를 채우는 것이 오히려 공익에 이롭다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누구의 탓인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자율에 맡겨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법이 엄해 따르는 것이면 단지 비굴하여 눈치만 볼 뿐이다. 법을 피하려고만 들 뿐 무엇이 잘못인지 알려 하지 않는다. 법으로 강제하기보다는 스스로 깨달아 실천할 수 있기를. 민주시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인으로서의 자율성이 아닐까. 자유란 자율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튼 이미 예상한 것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뻔히 다들 예상한 바 아닌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 벌써부터 바람잡이에 들어가는 것을 보니 참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노예인 것일 테지. 신민일 것이다. 시민이 아닌. 자율에 맡겨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들 배웠으니까. 그렇게들 가르쳐 왔으니까. 타진요 사태도 결국은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고. 입맛이 쓰다. 무척. 결국에 그런 수순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다양성에 기초한다. 민주주의란 불완전한 다수가 만들어가는 불완전한 체제다. 그런 만큼 다양한 대안이 필요하고 다양성은 민주주의를 완성시킨다. 민주주의 시민이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며 자율에 기반한 자유만이 다양성을 가능케 한다. 그 어떤 것인들 소홀할 수 있겠는가.
모기 한 마리 잡으려 초가삼간 태우지 말기를. 강 준설한다고 김에 쓰지도 않는 운하를 파거나. 이 또한 자초한 것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기본 가운데 기본일 터이니.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완벽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때로 거짓도 있고 허술함도 있고 엉터리도 있음을 알 때. 그것을 허용할 수 있을 때.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것은 그런 뜻이다. 물이 더럽다고 증류수에 물고기를 넣으면 살지 못한다. 당연한 상식일 터다.
타블로와 관련해 - 아니 이전부터도 악플러라면 이를 갈며 지긋지긋해하던 내가 악플러를 막자고 인터넷에 검열을 강화할 수 있는 조치들에 대해 벌써부터 반대하는 이유다. 상식을 위해서. 답답한 가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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