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망자 - 악역이 살아야 드라마도 산다!

까칠부 2010. 11. 10. 23:41

도망자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전에도 지적했던 정작 주역인데 호감가는 캐릭터가 없더라는 것. 그리고 한 가지는 매력적인 악역이 없다.

 

주인공이 호감이 가야 공감을 하게 된다. 극중 장치와 설정등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같은 긴장을 높여주는 것이 존재감 있는 악역이다. 악역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악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악일수록 사람들은 그 악에 매료된다. 그에 반발하고 분노하면서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에 이끌리게 된다. 악이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능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 것인가? 도대체 거기서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가? 안전한 곳에 있기에 그것은 더욱 흥미를 자아내는 요소가 된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데 그럴수록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 순수한 욕망이 만들어내는 향기에 이끌린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 맞서는 호감가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것을 볼 수 있게 되고.

 

아니 오히려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악역일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이야 누구이든. 하지만 악이란 누구라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악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악이 있음으로써 주인공은 정의된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이나, 주인공이 하는 행동들이 그로써 정의된다.

 

그러나 과연 지금까지 도망자가 그랬는가. 윤손하의 황미진 교수는 너무 힘이 떨어졌고, 송재호의 양회장 역시 악역으로써는 힘이 부족했다. 뭐랄까 순수한 악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주인공에 대한 호감이 부족한 만큼 더욱 악역의 형상화가 중요했는데 그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동안 지우와 진이, 비와 이나영에 대해 그닥 동의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악역이 악역같아야 그게 맞서는 주인공 입장에 공감이 되지. 지우의 캐릭터 자체가 악당에 가까웠던 데다가, 이후 개연성없는 전개가 더욱 몰입을 해치고 있었고. 그나마 가장 집중해서 보게 된 것이 도반장의 러브스토리였으니 말 다했달까?

 

그런데 오늘 나까무라 황. 물론 이박사도 대단한 악역으로서의 포쓰를 보여준다. 예전 007시리즈에 나왔던 죠스를 보는 것 같다. 어떻게 해도 칼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한 완벽함. 지우따위는 감히 덤비지도 못할 절대적인 폭력의 향기가 범상치 않은 외모와 더불어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이미 황미진을 제거한 그가 과연 어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를까? 다만 그에 비해서는 뒷마무리가 부족하달까? 황미진은 장사부를 죽였는데 이박사는 끝내 카이를 죽이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이건 대단한 악역 아닌가.

 

그러나 그와는 비교하 수 없이 오늘 하루를 지배한 것이 바로 나까무라 황이었다. 이제까지는 어딘가 빈 구석이 있어 보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탐정이었다. 바로 그 빈 구석이 나까무라 황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했고. 하지만 황금에 대한 탐욕으로 그같은 배려나 주의를 모두 잊은 채 폭주하는 모습이란 순수한 악의 향기 그 자체가 아닐까? 총을 가져오라 해놓고는 정작 그것을 쏘아 사람을 해치기보다 경찰서 앞에 데려다 놓아 강제출국시키도록 하는 것은 어쩐지 이제까지의 나까무라 황답기는 했지만 잠시도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을 하며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단 순수한 악의 존재감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결국에 이박사와 나까무라 황, 이 두 사람이 오늘의 방송분을 지배하지 않았을까? 물론 법에 대한 신뢰를 고집하는 도반장 이정진의 모습도 매력적이었지만 - 법을 믿지 못하겠다는 지우 앞에 법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던 그 모습은 지우가 "너는 형사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경찰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러나 역시 악이 풍기는 향기란 그 무엇보다 매혹적인 법이다.

 

다만 어딘가 상당히 정치적이구나. 아버지의 불법과 비리사실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양회장의 아들 대통령후보. 누군가의 모습과 많이 매치되지 않던가? 이제까지 경찰 등과 어울려 보여준 모습들이, 그러나 양회장과 그 아들이 분리되면서 묘하게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역시 KBS라는 것일까?

 

아무튼 재미있었다. 간만에 진짜 재미있었다. 이래야 드라마가 산다. 악역이 악역 같아야지. 악당이 악당다워야 무언가 해 볼 생각이 생긴다. 해보려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도 든다. 지우와 진이만으로는 부족하던 것을, 도반장과 양회장, 황교수만으로는 뭔가 아쉽던 것을 오늘에서야 제대로 채워준 느낌? 차라리 영화였다면 좋았을 것을. 여기까지 오기까지가 너무 시간이 걸려서. 많이 흐트러졌다.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이야기도 구체화되어가고. 괜히 쓸데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던 때에 비해 지금이 훨씬 짜임새도 있지 않은가. 다만 일본의 그 가수라는 여자친구는 어찌 되었을까? 개연성의 문제만큼은...

 

오늘만 같으면. 내일도 오늘과 같았으면. 그동안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 만큼 그래도 역시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계속해 이렇게만 같았으면 한다. 아주 간만에 만족했던 회차였다. 좋았다. 무척.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