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자기를 찾기 위한 여행...

까칠부 2010. 12. 6. 07:25

한때 일본에서 중년가장의 증발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도되었을 것이다. 사실 미국이나 선진국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젊어서야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린다. 회사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야심을 위해. 그러나 어느 순간 정신없이 달리다 주위를 돌아보니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작정 스피드 자랑하느라 차를 몰고 다니다 어느새 길을 잃고 멈춰서게 되는 것처럼.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하는가. 산에서 길을 잃으면 먼저 산 꼭데기로 올라간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지점을 먼저 찾고 그로부터 다시 길을 찾아 나온다.

 

남자에게도 갱년기가 있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남자이기에 덧씌워진 수많은 의무와 책임과 허세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때. 나이를 먹으면 여성은 남성화되고 남성은 여성화된다던가. 남성이라는 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아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훌훌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어딘가로...

 

그래서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아마 어디선가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일본의 노숙자 가운데는 그렇게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도망친 가장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멀쩡히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직장도 있었던.

 

갑작스런 여행. 어느날 갑자기 여행을 떠나라 한다. 여행을 떠나 사진을 찍어 오라고 한다. 미리 계획하지 않은 여행에서 사람들은 어디를 가려 할까? 평소 무의식 속에 가고자 했던 어딘다를 무의식 가운데 찾게 될 것이다. 김국진이 자기 고향을 찾고, 이윤석이 아버지를 찾고, 윤형빈이 자기를 찾던 것처럼.

 

1년 반 전에도 찾았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김국진이 그곳을 자주 찾는 모양이다. 아마 익숙한 공간에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서겠지. 그곳에서 이번에 다시 찾은 것은 황량하게 변한 풍경과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사진을 찍던 친구 김태원이었다. 아마 1년 반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했을 테지만, 중년의 우정이란 그리도 따뜻하고 든든했을 테지.

 

아버지를 찾아 떠났지만 이윤석이 발견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아버지가 놓은 레일 위를 달리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스스로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 길을 가셨고, 그 말씀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 길을 가며 들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언젠가 너도 네 아들의 손을 잡고 이 길을 오르게 될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큰 아들이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는 남자다. 전형적인 한국남자. 약하고 고루하고 때로는 한심하지만 그러나 남자로서의 자신을 항상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

 

그가 발견한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면서 역시 아버지로서 언젠가 아들 앞에 서게 될 자신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빈 자리만큼이나 그 자리를 채워가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 아니었을까? 이윤석과 같은 타입에게는 어쩌면 그런 적당한 긴장과 압력이 더 힘이 될지도.

 

윤형빈이 찾은 초등학교 시절 떡볶이집이라든가 연습생시절을 보냈던 대학로는 그가 처음 섰던 출발점이었다. 나름대로 성공했고 스타가 되었지만 과연 그런 지난 시절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이 있었을까?

 

자기를 목표로 꿈을 가지고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지난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을 격려하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이미 꿈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면서 지금의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보았겠지. 나는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내가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의미이고 어떤 가치인가. 나는 과연 어떻게 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후배들의 모습은 그래서 윤형빈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사진에는 지금도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절절한 이해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이경규는 떠밀리듯 부산으로 갔지만, 고향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친구이고 가족이었다. 어디 가나 환영받는 인기인이지만 유독 부산에서의 환영은 따뜻한 정감이 있었다. 근심없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시장사람들 가운데 이경규 역시 순수한 웃음을 되찾지 않았을까. 그가 항상 말하는 페이소스가 있는 웃음. 좋은 심성에서 나오는 좋은 웃음. 그 순간 사람들이 지어보인 웃음은 그것이었다.

 

그가 지나온 삶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 희극인으로서 단지 화면 너머로만 보던 그들의 웃는 모습들. 그리고 그 가운데 그 또한 50년의 연륜으로 함께 녹아들고 있었다.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여름 무한도전을 보면서도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었는데, 이걸 보고 있으려니 더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내가 간절히 가기를 바라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시시껍절한, 전혀 가공되지 않은 하찮은 이야기와 모습들이 있어서 더 마음에 와 닿았던. 나도 언제고 저렇게 떠나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떠날 수 있으리라.

 

가끔은 현실이 힘들고 고단할 때,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 혼란스러울 때,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할 때, 한 번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한 번 쯤은 지금 있는 곳에서 멀어져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나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은 미션이었는데... 어쩌면 조금 더 장기 미션으로 꾸며보아도 좋았을 텐데... 예전 어느 단막극처럼 각자가 홀로 여행을 떠나 보고 싶은 것들을 보고 듣고 싶은 것들을 듣고 하나씩을 찾아 돌아오는. 4박 5일이든, 6박 7일이든, 그보다 더 긴 시간이든. 바쁠까?

 

전날의 그 뉴스 때문에. 새삼 다시 보면서 김성민을 또 한 번 탓하게 된다. 그가 저리 되지 않았으면.

 

남자의 자격이 재미있는 만큼 그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바로 저곳에 그가 있어야 했는데.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김태원과 이경규에게 면박을 당하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다시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러나 결코 잊혀지지는 않으리라. 그가 그 자리를 채웠던...

 

아니 어쩌면 김성민도 여행을 떠났으면 어땠을까?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여행을. 속에 있는 거칠고 어두운 찌꺼기들을 훌훌 날려 버리고 다시 원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을.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겠지.

 

아쉽고 안타깝고 슬프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웃을 수 있는 아이러니일 테고. 연예인의 숙명이고, 그들을 소비하는 대중의 속성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웃는다. 그와는 상관없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한 번 보았을 때의 의미와, 두 번 보았을 때의 의미... 공감이 감동을 만든다. 진심으로 그것이 나의 이야기임을 느꼈다. 내가 남자의 자격을 보는 이유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