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프레지던트 - 두 가지 정치...

까칠부 2011. 1. 27. 06:22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건 피투성이 혈전입니다!"

"매너와 룰을 지켜가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깨끗하고 고상한 정치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대통령과 후보님께서 고고하게 폼잡고 있는 동안 밑에 있는 저희들은 손에 피를 묻히고 싸워야 했습니다."

"저라고 처음부터 이랬는 줄 아십니까? 후보님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꽃을 피웁니다. 후보님은 꽃을 피우세요. 진흙탕을 구르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제 목을 치십시오."

"그게 바로 정치입니다."

 

백찬기의 절규와 그리고 그 한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술집에서의 정치토론회. 막걸리를 마시며 후보자와 시민이 허심탄회하게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대안에 대하 의견을 나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단지 불평불만만을 토로하던 시민들이 어떤 희망을 가지게 된다.

 

"나 오늘 지나면 농장일 작파하고 장후보 따라갈 생각이네."

 

정치인은 믿을 수 없다. 정치인이 우리에게 해주는 게 무엇이냐? 하지만 그런 농민들에게 장일준은 말한다.

 

"지금 이대로의 농촌이라면 망해도 싸다."

 

반발하는 농민들에게 다시 말한다.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무역을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동안 그렇게 만들어 왔기에 다시 되돌리기도 힘들다. 무역을 않으면 도시에 나가 있는 여러분 가족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현실을 적시하고,

 

"농민 스스로 소비자를 감동시켜서 그들이 농촌을 찾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한다.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전국민과 함께 막걸리 토론회라도 열어야 할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또 의견을 전하는 사이 그들 사이에 어떤 신뢰가 형성되고 기대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기대를 흔히 희망이라 부른다.

 

명장이란 어떤 사람을 명장이라 부를까? 훌륭한 스승이란 어떤 사람을 훌륭한 스승이라 부를까? 맹장이든 지장이든 덕장이든 결국은 믿음을 심어주는 사람이다. 엄한 선생님이든 자상한 선생님이든 장차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기대를 갖게 하는 선생님이다. 희망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그들을 리더라 부른다.

 

리더의 역할은 다른 게 아니다. 물가를 내리라, 닭값이 너무 비싸다, 범죄가 일어났는데 수사를 엄중히 하라, 시장 가서 사진 찍고, 구제역 퍼진 곳 가서 사진 찍고, 그보다는 단지 그가 있음으로써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무언가 되겠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여기에 하나 더해서,

 

"나쁜 유권자가 나쁜 정치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려면 정치인을 욕하지 마십시오."

 

혼자서 이끌어가는 게 아니다. 선지자나 순교자는 전제주의 사회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니면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어떤 권위만이 선지자이고 순교자일 수 있다. 리더란 먼저 아는 존재도 아니고, 대신해 희생하는 존재도 아니다. 단지 앞에서 남들 가는 길에 한 발 먼저 앞서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다. 그것을 잊을 때 민주주의는 괴물을 탄생시키곤 한다. 죽은 선지나자 순교자는 성인이 될 수 있지만 살아있는 선지자나 순교자는 단지 독재자가 될 뿐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신념도 있다. 지향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국민과 공유할 것인가? 그것이 또 정치의 기술이라는 것이고 역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국민과 소통하여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했을 때 그를 진정한 리더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크나큰 포부를 가진 것은 좋다.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실천하려는 것은 좋다. 어떻게? 방안에 앉아 블로그에 글만 열심히 쓰고 있으면 그게 될까? 길거리에 나가 으샤으샤만 열심히 하면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까?

 

권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 일단 자기가 남들보다 앞서 가려 해도 남들보다 앞에 서야 한다. 희망을 주려 해도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듣고,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 옮기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정치다. 권력은 쟁취하는 방법. 전제주의 시대 권력을 쥐기 위한 암투와 민주주의사회에서의 선거가 그것이다. 이겨야 이상도 있다.

 

백찬기의 역할이 그것이다. 장일준이 끝내 청암과 화해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신희주가 박을섭과 손을 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먼저 손에 넣자. 먼저 권력을 손에 쥐고서야 김경무가 꿈꾸는 것이든 장일준이 지향하는 것이든 신희주가 그리는 그림이든 현실로 옮길 수 있다.

 

이상만으로 정치를 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정치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현실에 남는 것은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이 아니라 반정을 주도하여 정권을 쥔 인조의 정치다. 아무리 광해군이 정치를 잘했어도 스스로 권력을 지키지 못한 이상 조선의 국정을 결정한 것은 그와 반대편에 선 인조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선거에서 패하며 권력을 잃자 그들이 추진하던 모든 정책들이 전부 스톱되거나 과거로 회귀한 것도 마찬가지 예일 것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일단 이기고 나서야 정책도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현실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면 권력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가? 그것이 곧 정치다. 내 편을 끌어들여 세를 늘리고, 반대편을 배제하여 약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여러 이해주체가 참여하며 정치는 최대공약수를 찾아가게 된다.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정치를 잘하느냐 하는 것이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배신자가 아닌 무기력한 패배자야!"

 

내가 하고 싶은 말. 이번 카라 사태에서도 과연 카라 3인의 부모들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적절히 대처하여 DSP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어땠을까? DSP의 명분을 미연에 꺾어 버리고 주도권을 쥐고서 카라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면? 그러나 결과는 패배이고 카라마저도 덩달아 패배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련을 놓고 있지 않은 바람에 다른 사람들마저 피해를 보고 있다. 승리를 하고서야 비로소 정의를 말할 수 있다. 먼저 승리를 하고 살아남고서야 정당성을 따질 수 있다. 패배하여 사라지고 나면 단지 패배자로 남을 뿐이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언제고 설욕할 수 있다. 승리할 수 있다.

 

항상 감탄하며 보게 되는 이유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하는 드라마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정치란 어떤 메카니즘을 가지고 이루어지는가? 너무나 디테일헤서 때로는 섬뜩하고 불편하기도 한 드라마다. 쓸데없는 가정사나 러브라인만 조금 줄일 수 있어도 좋을테데. 하지만 그러자면 드라마가 너무 건조해지겠지?

 

그나저나 확실히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인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정치꾼과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단지 눈앞의 권좌에만 급급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조소희와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소신과 중심을 지키려는 장일준. 단일화를 하더라도 단일화 캠프에 조소희가 합류하는 것은 사양하겠다는 신희주의 말에 절대동의한다. 큰 일 낼 여자다. 장일준이 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면 바로 아내 조소희일 것이다. 분명 아마도 조소희로 인해 일도 크게 터질 텐데.

 

재미있었다. 심장이 조마조마했고 백찬기가 김경모에게 저 말을 할 때는 울컥 치미는 것도 있었다. 그는 타고난 책사다. 책사란 주군을 대신해 온갖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사람이다. 장일준이 선술집에서 농민들과 토론회를 하는 장면에는 나도 저런 자리에 있었으면. 누구나 바라는 로망일 테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 시청율은 현재 3사 가운데 최하지만 단연 그 가치만큼은 최상이라 내가 자부한다. 최수종은 정말 타고난 왕이다. 최수종이 있었기에 어쩌면 가능했을 드라마. 역대 정치드라마로서도 손에 꼽을 듯하다.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