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붙여 - 개발독재의 망령...

까칠부 2011. 2. 10. 16:35

어제 무릎팍도사 보는데 공지영이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하더라. 그 잘난 지식인들 언론인들 모두 외면하는 가운데 홀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몸을 불살랐던 이 시대의 성인. 나는 그를 지금도 20세기 한국 최고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불과 몇 년 전이다. 하루 16시간 노동은 당연했다. 토요일이야 당연하고 일요일조차 없었다. 근무시간 끝나면 잔업이고, 잔업 끝나면 야근이고, 야근 끝나면 철야고, 당시 구로공단에서는 노란 잠 안 오는 약이라는 알약을 팔았다. 각성제다. 불결한 작업환경에 부실한 영양상태에 가혹한 노동조건에, 그래서 병을 얻어 쫓겨난 여공들도 그리 많았었다. 산업재해에 대해 정부나 기업이 책임지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월급이나 많이 받으면? 잔업에 야근까지 시키고도 수당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월급이라고 받아봐야 집에 돈 부치고 하면 수중에 남는 것이란 거의 없었다.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일화에서도 차비를 아껴 걸어서 출퇴근하며 붕어빵을 나누어 먹었다는 이갸기가 나온다. 오래전 일 같지? 지금도 찾아보면 그런 곳 많다. 외국인 노동자라고 불법체류자라고 당하던 그 모든 것을 국내 - 심지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여공들이 당하고는 했었다. 아마 유명할 것이다. YH파업이라고 그래도 대통령께서 해결해주시리라 믿었다가 경찰이 퍼부은 오물을 맞고 속옷차림으로 강제로 끌려나가야 했던 이야기가.

 

그럼에도 월급 올려달라는 말을 못했다. 그런 말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국가경제를 위해서. 나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수출을 해야 하니까. 지금도 그러지? 노동자들이 월급 좀 더 올려달라고, 사람대접 좀 해 달라고 하면 나라경제 어쩌고, 수출 어쩌고, 그러니 네가 좀 희생해라. 연예인에 대해서도 좀 부당하면 어떤가? 억울하면 어떤가? 한류인데. 국가경젱력인데. 국익인데. 참아라.

 

그래서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월급 올려달라 하면,

 

"나가!"

 

항의라도 하면 바로 돌아온다.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 많아!"

 

하기는 얼마전 어디선가 파업 났을 때 사람들이 그러더라.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돈 더 받겠다고 저 지랄들이래?"

 

공장일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해 보이거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뭣하러 돈을 더 받는가? 그러고 보면 유럽에서 농민과 시민의 권익이 높아진 것이 흑사병 이후였다.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그만큼 농민과 시민의 권리고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근대 농업혁명으로 농업생산력이 늘어나고, 또 농촌의 구조조정으로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게 되면서 도시에는 농촌으로부터 밀려든 도시빈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산업혁명기 유럽의 경제를 떠받친 도시노동자들 -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심지어 어른은 임금 비싸다고 아이들 데려다가 쇠사슬로 묶어 놓고 일을 시키던 시절이었다. 아이를 낳고도 엄마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설탕물을 솜에 적셔 입에 물리고. 아니 심지어 도저히 아이를 기를 수 없어서 아이를 죽여주는 대행업까지 있었다. 오죽하면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한 세기 전보다 남성의 평균신장이 줄었다는 통계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노동력은 많고 일자리는 적었으니까.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몇 명 죽는다고 눈 하나 깜짝할 것이 없었다.

 

메이데이의 유래를 아는가. 사회주의라면 아마 경기부터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바로 그 인터네셔널의 주도로 미국에서 대규모 동맹파업이 일어난 것이 메이데이 - 노동절의 시작이었다. 그게 아마 1886년 5월 1일.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빨갱이라고 메이데이가 아닌 다른 날로 노동절을 지내고 했었다. 그렇게 수많은 노동자들, 지식인들, 혁명가들의 피와 죽음 앞에 쌓아 올린 것이 지금의 노동권인 것이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은 넘쳐나고 그들을 고용할 수 있는 직장은 적었다. 사용자는 갑이었고 노동자는 을이었다. 더구나 정부마저 사용자의 편을 들면서 노동자는 단지 시키는대로 일을 할 뿐이었다. 그리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그저 시키는대로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저 더 많은 시간을 더 열심히 더 싸게만 일할 수 있으면. 지금도 그런다. 더 오랜 시간 더 열심히 일하면 경제가 나아질 것이다. 생산성이 좋아지고 국가경쟁력이 좋아질 것이다.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과 더 좋은 처우를 바란다는 것은 반역이었다.

 

너 아니라도 사람은 많다. 너 아니라도 시나리오 작가는 많다. 시나리오야 어떻든 결국 영화를 만드는 건 돈이고 자본이다. 영화를 히트시키는 것도 인기배우 인기감독이다. 나머지는 깡그리 무시된다.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사람이 열정이 있으면 그 정도는 참아내야지. 잔업에 야근에 철야에 딱 일 하는 것도 그대로. 미성년자 데려다가도 잘도 일 시키고 부려먹는다. 뭐가 다를까? 단지 이병철이 잘하고 정주영이 잘하고 박정희가 잘했을 뿐 노동자는 단지 그 시혜를 입었을 뿐이고. 감독이 잘하고 주연배우가 잘하고 제작자가 잘했을 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뭐 한 것 있겠는가. 돈 더 바라면 그게 오히려 염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 창의력이 중요시된다.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노동력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단순작업에 있어서는 그같은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시나리오 따위 무슨 상관인가? 시나리오 작가 따위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아마 이번 정부 들어 시나리오와 작가에 대한 지원부분이 많이 줄어들었지. 딱 그 시절 마인드니까.

 

이제 경제에서도 원천기술이 중요해졌다. 독자적인 기술과 독자적인 디자인, 그리고 브랜드. 단순히 싼값에 열심히 일한다고 이익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몇 배나 더 비싼 임금을 받고서도 유럽의 고급상품들은 세계로 팔려나간다. 연예계는 더 그렇겠지. 설계도에 해당하는 시나리오가 있어야겠고, 기술자에 해당하는 스태프가 있어야겠고, 무엇보다 배우며 가수 같은 아티스트도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 모두를 단순한 고용노동자로 보고 마는 것은. 쓰고 버린다. 적당히 쓰고 소모되면 버리고 다시 가져다 쓴다. 하기는 SM만 해도 소속 아이돌 그렇게 계속 해체되었어도 다시 아이돌을 데뷔시켜 성공하고 있으니까. 연예인 지망생도 많고, 스태프 지망생도 많고, 작가 지망생도 많다. 열정에 넘치고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자세가 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그래서 작가들이 한 번 파업을 했을 것이다. 배우들도 지지성명을 내고 햇었다. 스스로 쟁취하려 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문화가 되어 있다. 물론 도무지 재능이나 실력이 안 된다면 그들 역시 도태되겠지만 그렇다고 작품이 계약까지 되고서 돈을 받지 못해 굶어죽는 일은 없다. 모든 일에는 댓가가 따르며 남다른 재능이 있다면 그것을 존중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재능마저도 계량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영재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많은 사람을 더 싸게 더 오래 일을 시키면. 아니더라도 다른 재능을 찾으면 되지. 오로지 그 한 사람밖에 없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한 사람 정도 사라진다고 자기에게 피해가 올 것은 없다. 사람도 많고 재능도 많으니까.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고 부려먹던 70년대, 80년대의 노동환경과 그리고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와 이번 최고은 작가의 죽음의 문제. 여전히 더 싼 값에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할 것을 요구하며 더 많은 돈과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분위기와. 그리고 국익. 국가. 민족.

 

어쩌면 그것은 창작자에 대한 문제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을 수단으로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회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대상이다. 그 재능마저도 얼마든지 소비할 수 있고 소모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다. 군사독재가 너무 길었던 것일까? 그리고 한국인에게 군사독재가 너무 잘 어울려서일까.

 

자기 일로부터의 소외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기가 생산한 제품으로부터 소외되는 것. 노동자가 정당하게 자신의 노동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 자기가 일한 노동에 대해서마저 온전하게 그 소유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제품이야 사용자가 갖는 것이더라도 그에 대한 정당한 인정과 댓가가 따르는가.

 

창작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고 지불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차라리 철저하게 부정하여 기대라도 말게 하던가. 일은 시키고 제품은 구입했으되 그 댓가는 지불할 수 없다. 그것이 강도짓과 무슨 차이일까? 그 노력의 결과는 온전히 자기 소유일 텐데도 일부만으로 그것을 전유하고자 한다는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해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면 그것은 또한 살인과 뭐가 다를 것인가.

 

19세기 유럽의 노동자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왜 공산주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70년대 80년대 한국 노동현실을 보면 어째서 대학생들이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그리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는가를 안다. 끝내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라는 것도. 우리는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는가. 여전히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과 그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스러질 수밖에 없는 개인들과.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

 

개명한 21세기에 19세기를 말하는 것도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개명한 21세기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것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도 재능을 인정받고 작품까지 계약하고서도 제대로 된 댓가를 받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면. 이것을 웃어야 할까? 산다는 자체가 블랙코미디일지도. 생각만 깊다. 예나 지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