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이라 했을 때 어떤 마초적인 남자를 떠올린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 1회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확실히 자기 여자를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이야 말로 마초의 로망일 것이므로. 말하건대 남자가 되어서 여자와 아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그러나 웬걸? 1화에서 그럭저럭 마초의 모습을 보여주던 것이 두번째 미션 금연에서부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해병대편과 엄마되기 편에서는 이게 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완전히 망가지고 있었다. 아니 남자가 되어서 군대 가라면 가는 거지 도대체가 그렇게 가기 싫어 투덜대고 몸사리고 빼고...
실제 바로 그런 부분에서 금연학교에서 정점을 찍었던 남자의 자격의 시청율은 해병대 편에서 빠지기 시작하더니 엄마되기에서는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특히 엄마되기에서 남자가 되어서 아이를 보는 것이나, 아이를 보느라 쩔쩔매는 모습들이 마초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기대를 크게 배신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게시판에 가 보더라도 가장 몸을 빼는 캐릭터인 김태원에 대한 불만이 높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것이 남자의 본래모습이다. 그렇지 않은가? 용감하고 강한?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아니 그런 남자가 어디있어? 있나? 그런 남자가?
원래 남자는 객기고 여자는 허영이다. 남자의 허영이 객기고 여자의 객기가 허영이다. 객기 없으면 또 남자가 아니다. 괜히 없어도 있는 척, 겁먹어도 용감한 척, 약해도 강한 척, 비겁해도 당당한 척... 젝스키스의 노래 가운데 그런 게 있었지.
"사나이 가는 길에 기죽지 마라, 없어도 자존심만 지키면... 폼생폼사야!"
김형배의 노래 가운데서도 그런 게 있었다.
"크게 한 번 웃어봐. 멀리 한 번 바라봐. 나 혼자면 어때하고 생각해, 남자답게 그렇게..."
그게 남자라는 동물이다. 문지방에 발이 찧어 발톱이 빠지고 피가 나도 아프지 않은 척... 슬픈 영화를 보고 목이 메이는데도 전혀 그런 것 없이 쿨한 척...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자답지 않다고들 하니까. 그래서 참 남자라는 건 슬픈 짐승이기도 하다. 전혀 그런 게 아닌데 남자답기 위해서 그리 허세를 떨어야 하니...
<남자의 자격>에서 보여지는 남자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남자의 자격이란다. 남자라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란다. 그런데 하기 싫어 죽겠다. 진짜 하기 싫어 미치겠다. 시작부터 투덜투덜... 하기 싫어 버럭버럭... 그러면서 괜히 열심히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과 비아냥과 공격이 퍼부어지고... 딱 가면이 벗겨진 남자다.
하긴 아저씨들이다. 그게 중요하다. 아저씨라는 것. 아줌마들도 그렇지만 아저씨란 이미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짧게 남은 사람들이다. 더 이상 이루어야 할 것도 없고 그저 이제까지처럼만 남은 삶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체면이고 허세가 필요할까? 아니 남자인 이상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런 고생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번주 "꽃중년되기"나 다음주 "12시간 눈물의 버라이어티"는 컨셉을 잘 살린 최적의 미션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 늙어서 꽃중년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저씨들의 모습에, 닳고 닳은 아저씨들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는 모습들까지... 그래도 남자의 자격이라는 거지. 그 미묘한 부조화가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괜히 난 척 하는 마초적인 남자의 모습을 기대할 것이라면 <남자의 자격>은 실망만 안겨주기 쉬울 것이다.
"왜 열심히들 하지 않는가?"
"왜 맨날 투덜거리기만 하는가?"
"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김성민을 미워하고 왕따시키는가?"
"몸도 안 되면서 김태원은 빠지라!"
"하는 일 없는 이윤석은 그만두라!"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남자의 자격>만의 개성인 것이다. 한창 나이의 아직은 허세가 필요한 젊은 남자들의 마초적인 모습이 아닌, 이미 살 만큼 산 아저씨들의 가식을 벗어던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남자의 모습이라는 것이... 미션은 거창한데 전혀 거창하지 않은 그 작고 나약하고 수줍은 모습들이라는 것이...
그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의 핵심을 셋으로 꼽는다. 이경규와 김태원과 김성민...
이경규는 아다시피 최고의 버라이어티 MC로써 그러나 작년 연이은 실패 끝에 영락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기획한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대로 허세를 부리다가 김국진에게 허물어지는 모습은 얼마나 통쾌한가? 그럼에도 여전히 버럭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김성민과는 아웅다웅하면서, 예림이에게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국민약골을 넘어 국민시체의 별명을 얻은 김태원도 그렇다. 한국 락의 전설에서 아주 기본적인 미션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한심스런 체력과 그에 어울리는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무책임하며, 때로는 나약한 모습이란 이경규와 더불어 귀엽다 못해 동정심을 자아내는 캐릭터가 된다. 어쩐지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은 그런 캐릭터가 김태원 말고 또 누가 있을까? 그래서 자연스레 하지 못해도, 하지 않으려 해도, 그 국민시체의 캐릭터로 인해 용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반대편에서 뭐든지 열심인 - 딱 머리까지 근육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마초의 캐릭터가 김성민이고. 마초라고 그저 우악스런 마초가 아니라 생각없이 그냥 무작정 열심인 그런 마초다. 무엇보다 그 마초스러움이 아저씨 특유의 귀차니즘이 묻혀버린다는 것이 포인트라 할 수 있는데, 덕분에 김성민의 캐릭터는 남자의 자격에서도 가장 동떨어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버렸고, 그런 김성민의 캐릭터와의 갈등이 <남자의 자격>의 가장 중요한 웃음코드가 되어 버렸다. 아마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성공한 캐릭터일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김태원과 이경규와 김국진의 만담... 진짜 이렇게 철없는 아저씨들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이들의 만담은 실없다. 가차없이 말하자면 나이값을 못하고, 조금 좋게 말하자면 천진하다. 이경규와 김태원을 잡는 그나마 상식적인 김국진과 만담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김태원과 이경규와... 보고 있자면 긴장이 확 풀어진다. 미션과는 동떨어진,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무척이나 한가한 아저씨스런 재미가 있다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점만 있느냐면 그것은 아닌 것이,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출발부터 마니악할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남자라는 동물 자체가 허세가 아예 뼛속까지 뿌리박힌 동물이다 보니, 아무리 허세 없이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들이란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탓이다. 여자들 입장에서도 남자답지 않은 남자란 비호감일 수 있고. 해피선데이 게시판에서 보이는 비판들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그게 이 프로그램의 장점이자 한계다. 흔히 보기 드문 남자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그것이 그다지 보편적이지는 못하다는 것이 한계인 것이다. 현재 남자의 자격의 시청율이 패떳에 밀렸다지만 정체를 보이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생경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모습들이.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컨셉을 버리고 뻔한 마초적인 남자의 모습을 추구하려 한다면 - 그래서 현재의 칙칙한 면면을 바꾸거나 한다면 그때는 오히려 지금만도 못한 결과를 내기 쉬운 것이, 그럴 경우 워낙에 겹치는 프로그램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초야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 그런 것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따라서 <남자의 자격>이 살자면 지금의 개성적인 컨셉은 유지한 채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이번 <꽃중년되기>는 꽤 흥미로운 시도였다. 다음 <12시간 눈물버라이어티>도 그렇고. 아직 그 효과는 미미하지만 이런 식으로 크게 멀리 보고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다면 뭔가 결과가 있으리라. 장담은 못하지만서도.
아무튼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남자의 자격>이다. 뻔히 보이는 대본질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꽁트처럼 여기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역시 <남자의 자격>만이 갖는 자연스러움 - 훈훈함 때문일 것이다. 억지스러운 것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정말이지 간만에 볼만한 프로그램을 만난 것 같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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