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하다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몰라도 알아서 유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서 아니까 유명한 것이다. 즉 전자는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알려 하니까 그제서야 아는 것이다. 더 유명한 건? 당연히 전자. 굳이 말하자면 후자는 그냥 스타라면 전자는 그를 넘어선 슈퍼스타?
내가 생각하는 히트곡의 기준이 있다. 내가 들으려 해서 듣는가? 아니면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리는가? 예를 들어 소녀시대의 GEE가 그랬다. 사실 나는 그 노래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소녀시대에 관심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전혀 들을 생각도 없는데 시도때도 없이 들리는 거다. 미칠 정도로.
마찬가지다. 어디 가서 라면을 사먹으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신라면이다. 드링크제라 하면 가장 먼저 박카스를 떠올리고, 비타민드링크라면 비타500을 말하게 된다. 아스피린은 진통제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알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몰라서 더 떠올리게 되는 이름들이다.
만일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걸그룹 좋아하세요?"
나는 당연히 "예"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걸그룹을 딱히 좋아하지 않으면?
"혹시 아는 걸그룹 있으세요?"
누구를 떠올릴까?
"좋아하는 멤버는?"
과연 그때 누구를 떠올리게 될까? 아마 모르면 몰라도 10이면 8, 9 정도는 소녀시대와 태연, 윤아, 제시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좋아서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게 바로 소녀시대와 다른 걸그룹과의 차이다. 언제부터인가 걸그룹이라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소녀시대를 떠올리게 되었다. 딱히 소녀시대의 히트곡은 몰라도, 더구나 소녀시대의 멤버가 누구인지 몇 명인지도 모르는 경우에라도,
"걸그룹 누구 좋아하세요?"
물론 좋아하는 걸그룹이 없다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 들어 대답한다면,
"소녀시대요!"
멤버는요?
"태연이 예쁜 것 같아요."
"윤... 아던가?"
오죽하면 원더걸스의 텔미에서 소핫, 노바디까지 노래가사까지 다 외울 정도가 되었으면서도 정작 멤버 이름은 모르던 내가 소녀시대 이름은 다 알 정도가 되었겠는가? 소녀시대의 소녀시대 편곡과 안무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비호감으로 찍고 일부러 관심도 안 가졌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시대 멤버를 얼굴과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 성격까지도.
이것은 원더걸스조차 이루지 못한 성관였다. 말했듯 나는 원더걸스의 히트곡은 알아도 원더걸스의 멤버까지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걸그룹이라 하면 당연히 원더걸스라... 그런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냥 원더걸스라는 걸그룹 이름과 그 히트곡을 아는 정도? 반면 소녀시대는 그 멤버 하나하나의 이름까지 각인되어 버렸다.
SM의 마케팅의 승리였다. 물론 Gee가 대박친 것도 있을 것이다. Gee가 대박치면서 사람들에게 소녀시대를 더 알릴 수 있었고. 그러나 역시 그보다는 예능이었다. 혹사네 이미지손상이네 비판이 있었어도 끊임없이 예능을 돌리고 얼굴을 알린 결과 어느샌가 사람들 머리에 각인이 된 것이었다.
"아, 쟤들이 소녀시대였지?"
"쟤가 수영인가? 예쁘네?"
"유리? 오홋..."
"제시카? 쟤가 저렇게 예뻤나?"
각 개인에 대한 인지도 향상은 다시 소녀시대에 대한 인지도로 이어지고, 소녀시대의 인지도는 다시 소녀시대 멤버로서의 각 멤버의 인지도로 이어졌다. 그렇게 되도록 마케팅을 했다. 노래와 함께 소녀시대라고 하는 브랜드까지 널리 알리고자. 더구나 마침 소녀시대와 걸그룹 라이벌구도를 이루며 2008년 걸그룹의 판을 키워놓은 당사자인 원더걸스까지 미국으로 떠난 뒤였으니. 원더걸스가 떠나버린 빈자리까지도 달리 대안이 없는 가운데 소녀시대가 다 가져가 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거대 공룡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달까?
사실 지금에 와서 소녀시대에게 라이벌이란 의미가 없다. 설사 원더걸스가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국내활동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선점효과라는 것이다. 이미 먼저 소녀시대가 걸그룹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누구나 걸그룹이라 하면 소녀시대를 떠올리고, 아이돌이라 하면 소녀시대 멤버를 떠올린다. 미국에서 아무리 빌보드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했다 하더라도 국내세어 원더걸스란 이미 소녀시대를 제외한 나머지 걸그룹에 불과하다.
카라도 마찬가지다. 2NE1도 마찬가지다. 티아라도, F(x)도, 포미닛도 같다. 아마 그들 팬덤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소녀시대를 라이벌로 여기는가?"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걸그룹의 탑은 소녀시대이며 단지 나머지는 2인자 싸움을 하고 있다. 2NE1이 현재 가장 앞서고 있고 그 다음이 카라, 티아라와 애프터스쿨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고, 브아걸은 열외. 브아걸은 반칙이다.
그것은 단순히 소녀시대의 팬덤이 크고 말고 한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팬덤의 규모나 충성도에서 다른 걸그룹의 팬덤이 소녀시대에 상대가 되지 않기는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걸그룹이라 할 때 어느새 사람들이 소녀시대를 떠올리고 한다는 게 더 큰 것이다. 걸그룹을 이야기하고 아이돌을 이야기 할 때 다른 걸그룹을 대표해 가장 먼저 떠올리고 이야기하는 것이 소녀시대에고 소녀시대 멤버라는 것이.
사실 2NE1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전제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시대를 정면에서 이기려 하지 않았다. 대신 소녀시대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틈새를 찾았다. 실력파라는 이미지와 정형화된 소녀시대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스타일을 통해 소녀시대 이외의 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선택한 전략이 소녀시대와는 달리 언론에 노출을 자제하는, 즉 소녀시대가 선점한 아이돌 걸그룹이라는 시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실력파로써 이미지관리에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 결과 지금도 2NE1과 소녀시대는 가장 팬층이 겹치지 않는다. 카라와 티아라로는 팬들이 이동하고 해도.
아마 그런 것이 잘 드러난 것이 어제 있었던 KBS가요대전에서의 인기가요 투표가 아니었을까? 모두가 납득하면서도 불만스러워했었다. 걸그룹의 팬덤이라면 누구나 어째서 소녀시대의 Gee가 2PM의 Again&Again보다 못하느냐? 카라의 투표수가 적은 것도 불만이었지만 소녀시대가 2PM에 뒤지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또한 2NE1 팬덤의 막강한 화력에 대해서도 많이들 놀라고 있었고. 어느샌가 소녀시대가 마치 걸그룹의 대표인 양 - 실제 그랬었던 것이었다.
말하지만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이 다르고 사람마다 하는 생각이며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내가 관찰한 어떤 일반적인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에 와서는 따라서 소녀시대 노래 하나를 더 히트시키고 말고도 사실 별 의미가 없어졌다. 노래 하나 더 뜨고 말고로 희비가 교차하는 다른 걸그룹과는 달리 소녀시대는 이미 히트곡의 여부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써 브랜드가 되어 버렸으니. Gee를 부르는 소녀시대가 아니라 소녀시대가 부르는 '소원을 말해봐'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소비가 될 수 있고. 아무리 음판이 높고 음원이 잘 나갔어도 시장에서 대하는 위상이 소녀시대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SM으로서도 그게 고민일 것이다. 이미 어지간한 히트곡으로는 소녀시대의 기존의 브랜드가치에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다. 아주 망하는 노래만 아니라면 일단 소녀시대라는 이름만으로도 팔릴 것이고, 어지간히 좋은 노래로도 소녀시대라는 이름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어떤 노래로도 소녀시대를 띄우지 못하고, 어떤 시대로도 소녀시대를 묻지도 못하고, 그러나 현상유지라면 언젠가는 사람들도 질리고 만다. 아마 박진영도 그런 고민 때문에 원더걸스를 미국으로 데려간 것일 테지만. 아마 그래서 SM도 선뜻 소녀시대의 다음 활동에 대해 확정해 말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그것도 꽤 부담일 터이니. 그냥 커버린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써 걸그룹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나니 그게 오히려 더 부담이랄까?
사실 이건 다른 걸그룹에도 심각할 수 있는 문제다. 시장의 지표라는 게 있다. 라면이 얼마나 팔리는가? 신라면이 얼마나 팔리는가를 보면 된다. 드링크제 시장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박카스를 보면 된다. 걸그룹도 마찬가지다. 이미 소녀시대가 걸그룹을 상징하는데 걸그룹이 어느새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하면? 대중으로부터 식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과연 그 시장은 다른 걸그룹으로 이동하게 될까?
물론 팬덤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시장이란 팬덤을 넘어선 사실상 걸그룹을 대표해 소녀시대와 마주하고 있는 일반 대중을 말하는 것이다. 걸그룹이 뭐가 있는지도 어떤 노래가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소녀시대라는 이름만큼은 들어 알고 있는, 그러나 각종 행사 등 걸그룹을 실질적으로 먹여살리는 시장이다. 때에 따라 소녀시대에서 브아걸로, 카라로, 다시 포미닛으로, 티아라로, 애프터스쿨로 바꾸어 갈아타며 그들의 음악을 소비하는. 그런데 그들로부터 소녀시대가 식상하다 외면받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대표 걸그룹 소녀시대라는 것이다. 걸그룹 가운데 걸그룹, 걸그룹 위의 걸그룹, 걸그룹을 이야기하더라도 항상 소녀시대를 먼저 전제하고, 심지어 소녀시대만큼은 열외로 두고 이야기하는 것. 팬덤조차도 감히 소녀시대만큼은 경쟁상대에서 빼고 이야기하는 것. 마치 쿄진 전성시대의 일본 프로야구와 같다고나 할까? 먼저 쿄진, 그리고 자기팀. 안티 쿄진조차도 쿄진의 영향력 아래 존재했다. 결국 쿄진의 성적이 부진하며 인기가 전만 못하자 일본프로야구 전반의 인기가 함께 추락하는. 또 그게 또 소녀시대 자신에게도 부담이 되고 마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설사 관심이 없어도 걸그룹과 얽혀서는 반드시 연관될 수밖에 없는 이름. 좋아해서도 싫어해서도 아닌 관심조차 없어도 걸그룹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는 이름. 걸그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튀어나오는 이름. 아마 앞으로도 이런 걸그룹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걸그룹 그 자체. 다른 걸그룹과 위상이 차원이 다르다는 건 이런 뜻일 것이다. 요즘 꽤 홀대받는 경향이 있지만.
아무튼 따라서 지금의 걸그룹 열풍이 내년에도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는 소녀시대의 활약 여부에 달려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처럼만 유지할 수 있어도 비록 시장이 더 커지지는 않아도 현상유지는 될 터인데. 그러나 요즘 SM이 워낙 불안불안해서. 그렇다고 딱히 대안도 보이지 않고.
요주의 체크포인트다. 과연 내년 소녀시대의 활동은 어떠할 것인가? 걸그룹에 관심이 있는 입장으로서는. 더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날아오르면 또 어디까지? 거기에 걸그룹 전체의 판도가 정해질 것이니. 소녀시대가 뜨면 다른 걸그룹도 뜨고, 소녀시대가 지면 다른 걸그룹도 진다. 과연... 잘 하라, SM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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