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신과 이환경의 오만...

까칠부 2012. 4. 2. 19:30

사실 아마추어들이기에 흔히 저지르는 실수일 것이다. 저 할 말만을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을 일방적으로 전하려고만 한다. 설명이 많다. 드라마는 그래서는 안된다.


언제부터인가는 모른다. 내가 이환경이 쓰는 모든 드라마를 일일이 챙겨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어느 순간부터 그의 드라마가 바뀌고 있었다. 지나치게 설명이 많다. 주입하려 든다. 강요하려 든다. 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만큼 더욱 드라마는 단순해지고 있었다. 유치하다.


어느새 무협소설이 되어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무협지다. 무협지란 단순하다. 그런 만큼 명쾌하다. 의도가 드러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를 위한 수단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환경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완고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옳다. 자기가 쓰는 것이 좋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자만이었을까? 확실히 한때 그는 잘나가는 드라마작가였다. 잘나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성공에 도취된 듯 그 자리에서 오롯이 그 성공을 벼려버리고 만다. 날만을 세운다. 잔뜩 힘이 들어간 인물들과 대사들 가운데 그의 명확한 의도만이 남는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어온 의도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재미는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작가로서 드라마를 쓴다. 대하드라마라는 게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무협이란 원래 유치하고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다. 그것을 호쾌하다고 한다. 호쾌함과 유치함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최소한 내게 있어 <무신>이란 매우 유치하다. 보지 않는 이유다.


역사에 대한 고증은 굳이 따져묻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나라 역사드라마에서 고증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무리다. 시청자 자신이 그것을 크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드라마가 재미없다. 진부하고 지루하다. 뻔하다. 소통하는 법을 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소통이 된다는 것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일 것이다. 항상 그렇듯.


역시 나는 욕하려 보는 취미란 없다.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계백>은 욕하면서도 끝까지 봤는데 이건 좀 무리다. <계백>은 유치하더라도 아기자기한 재미는 있었다. 모두가 이환경의 손짓을 따라 한 방향만을 보고 달려가는 가운데 공만 쫓아 무작정 달리는 초등학교 축구와도 같다.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취향은 아니다.


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섬세한 것을 좋아한다. 디테일한 것을 좋아한다. 호쾌하다면 선이 굵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방향이 올바라야 한다. 무엇하나 맞지 않는다. 안타깝다. 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