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차칸남자 - 악하지 않은 악녀에 대해서...

까칠부 2012. 9. 14. 09:47

아마 플라톤은 선과 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악이란 선이 결여된 상태라고. 인간의 행동윤리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 말은 상당부분 타당하다. 인간이 갖는 본연의 이성과 양심이라고 하는 도덕적 기구와 그 실천에 있어 악이란 선에 대한 나약함이며 빈약함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역시 언제나처럼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한재희(박시연 분)의 캐릭터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악녀라 하기에는 너무 착하다. 강마루(송중기 분)가 자기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겠다 했을 때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서회장(김영철 분) 앞에서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강마루로 하여금 공갈협박 혐의로 조사받도록 만든 그 일 역시 원래는 선의로 그에게 약간이나마 금전적 보상을 하기 위함이었다. 단지 그같은 선의를 지키기에는 그녀는 너무 이기적이다. 그리고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다.

 

서은기(문채원 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은기가 비행기 안에서 쓰러졌을 때 그녀는 필사적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강마루를 알아보고도 그와 맞서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과거 강마루에게 가졌던 감정이나 과거 그 일로 인해 마음의 짐처럼 가지고 있을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에 비추어 봤을 때 그것은 한재희 그녀로서도 무척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던 행동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상대가 편안한 마음 놓을 수 있는 강마루라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서은기의 자신에 대한 악의에 대해서는 끝까지 선의를 지키며 대하지 못한다. 이대로 잠시 물러나고 양보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공포이고 굴욕이다.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만다. 차라리 악의를 꾸며서라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다. 가련한 그녀다.

 

어째서 인간은 악에 물드는가? 악에 빠져들고 마는가? 원래 악해서라 한다면 너무나 쉽다.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인간은 선하다. 선과 악을 판단할 줄 아는 이성이 있고, 그 가운데 선을 쫓고자 하는 도덕적 양심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악을 저지르고 만다. 하기는 그래서 강마루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제비노릇을 하고 있고, 문채원 역시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자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악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 약해서, 그래서 가련해서 악에 물들고 악을 치장하고 만다. 그렇게밖에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어쩌면 문채원의 해석이 옳을 지 모르겠다. 문채원의 연기가 서툰 것이 아니라 실제 서은기 자신이 드라마 안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 게다. 노조와 협상을 한다. 장기근속 비정규직에 대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아버지 서회장과는 다르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마약소지의 혐의를 대신 뒤집어쓴 그녀에게는 뜻밖에도 여린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여린 부분을 가리기 위해 그녀는 짐짓 독한 연기를 해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어머니가 쫓겨나고, 그 자리를 정부가 대신 차지하고, 그리고 자신의 자리마저 노린다. 그녀는 독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억지로라도. 가면으로라도.

 

그런 점에서 강마루가 차칸 남자인 이유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재희는 이기적이다. 그리고 겁 또한 많다. 그녀는 항상 벼랑 위에서 살아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라고는 없는 막다른 길 위에서 필사적으로 버텨왔었다. 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밀려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뒤를 돌아볼 수 없다. 아래를 내려다 볼 수도 없다. 오로지 위만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강마루에게는 항상 돌보아야 하는 자신의 옆이, 뒤가 가까이에 있었다. 그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가 있었고, 그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이복동생 초코(이유비 분)이 있었다. 한재희 역시 그가 항상 돌아봐야 하는 옆이며 뒤며 아래였을 것이다. 그 모든 짐을 지고서도 그는 한 번도 힘겨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는 착하다.

 

처벌을 받을 위기다. 살인죄로 징역을 살고 나왔는데 다시 전과자가 되어 감옥으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조차 그는 한재희를 지키려 한다. 남자로서. 한재희를 사랑했던 남자로서. 그녀가 자신을 저버리고 대기업 총수의 세컨드로, 이제는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아이까지 낳은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그런 강마루조차 여동생 초코가 위독한 상황에서는 마냥 착해질 수 없다. 과거 수도승들이 개인적인 인연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끊으려 했던 이유일 것이다. 사상을 위해 강해지고, 사랑으로 인해 약해진다.

 

전형적이지만 흥미로운 이유다. 아직 드라마에는 악역이 등장하고 있지 않다. 서회장 정도가 악역이 될까? 강마루는 착하고, 서은기는 필사적이고, 한재희는 자신을 지키기에 아직 너무 버겁기만 하다. 그래서 얽힌다. 서로의 약한 부분이. 서로의 약한 부분을 가리고자 독기를 풍기며. 그것이 다시 드라마를 음울하게 만든다. 인간을 음울하게 만든다.

 

한재희가 진정 악녀가 될 것인가? 결국 서은기가 그러려고 하는 이상 한재희는 서은기와 맞설 수밖에 없다.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마음의 빚이 강마루를 대하며 필사적이 되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 엇갈린다. 얽힌다. 악의가 없이도 악을 저지르고, 오로지 선의만으로도 죄를 짓는다. 서회장이 배후에 있다. 아직 김영철 특유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은 채다.

 

전형적인 것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진부한 것이 좋은 때도 있다. 익숙하다. 그래서 이해하기도 집중하기도 쉽다. 전체적인 구도가 그려지는 가운데 약간의 변수들이 흥미를 더한다. 특히 한재희. 물론 드라마의 중심은 강마루와 서은기의 매력이다. 나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