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현(조승우 분)의 영웅만들기가 이번에는 조금 넘어선 느낌이다. 해부를 통해 병의 정확한 증상을 밝히고, 주변환경을 살펴서 발병의 원인을 찾는다. 유럽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역학조사가 이루어진 것이 19세기의 일이다. 1854년 존 스노우 경은 식수원과 콜레라의 발병지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여 콜레라균이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콜레라가 물을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니 강지녕(이요원 분)이 19살이 되는 이해 1663년은 그로부터 딱 191년 전이된다. 그야말로 세계사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1914년 당시까지 나병의 일종으로 전염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던 펠라그라에 대해 스페인의 한 의사는 정작 펠라그라 환자를 보살피는 의사와 간호사 가운데 발병자가 없음에 유의하여 마침내 그것이 전염병이 아닌 단순한 동물성 단백질 가운데 나이아신이 부족해 생겨난 증상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었다. 모두가 소에게서 전염된 두창이라고 알고 있는 가운데 유독 백광현만이 그같은 판단에 의문을 품고 소를 해부하여 병의 정확한 증상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 증상을 토대로 주변환경을 살펴 원안을 찾는다. 다만 그럼에도 전근대사회의 한계가 엿보인다는 것은 대조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가운데 대조를 통해 그 차이를 밝혀낸다. 그러나 백광현은 단지 발로 뛸 뿐이다.
너무 빠르다. 이제 19살이면 아직 한참 배워야 할 나이다. 마의로서도 조금 더 배우고 경험을 쌓아야 하며 장차 사람을 치료하려 해도 말과 사람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고 이해를 깊이 다져가야 하는 때이다. 그런데 아직 마의로서도 한참 부족한 이때 백광현은 벌써 크게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내려 한다. 그 대상은 무려 내의원 수의를 노리고 있는 이명환(손창민 분)과 조정의 실세인 정두조(김창완 분)이다. 판을 너무 크게 벌렸다. 백광현이 하려는 일도 크고, 그로 인해 그가 맞닥뜨리게 될 상대 또한 너무 크다. 이제 강지녕까지 병에 전염되었으니 이명환의 아들 이성하(이상우 분)과도 악연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의사로서 성장하기도 전에 그는 주위와 갈등부터 빚고 만다.
전형적인 스타일일 것이다. 개인의 역량보다, 개인의 성품이나 개성보다, 그보다는 주위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어떻게 얼마나 노력해서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보다 그것이 주위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집중하려 한다. 비천한 마의에서 최초의 한방외과의로서 태의라고까지 불리운 백광현의 선구자적 일생 또한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원수인 이명환과 그 배후의 정두조와의 대립을 통해 꾸려나가게 된다. 쉽고 편하다. 개인의 성장과 완성이란 그만큼 길고 지루하고 확신할 수 없는 작업인 탓이다.
이명환이 정상이다. 주위 의원들이 정상이다. 아니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까지 병의 치료란 증상에 따른 대증치료였지 그 원인을 살펴 발병원인 자체를 근절하는 것이 아니었다. 증상이 있으면 병이 있는 것이지 병과 증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열이 오르면 열을 내리게 하고, 기침을 하면 기침을 멎게 한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허준>은 매우 고증에 철저한 드라마였다. 단지 열을 내리는데 효과가 있다고 전염병이 창궐하는데 매실즙을 약으로 쓴다. 현대의학에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광현이 지나치다. 시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백광현을 현대에서 과거로 타임슬립한 의사로 만들고 싶은 것일까? 더구나 백광현이 다른 원인을 의심하기 전까지 어떤 의심할만한 정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소에서 옮은 두창으로 보이고 있었다.
무언가 조바심마저 느껴지려 하고 있다.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일까? 시청률일까? 하긴 경쟁방송사에서 이미 시간을 거스른 의사의 이야기를 방영하고 있다. 같은 날 시작한 <울랄라부부> 역시 독특한 소재와 배우들의 열연을 전면에 내세워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특별기획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이고 막대한 돈과 물자, 인력, 그리고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작품인데 시청율에서 뒤져서는 아무래도 보기에 그다지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기에 승부를 보려 한다. 그래서 시청률을 담보하는 아역을 무리하게 등장시켰고, 설정과 전개에서도 대중이 좋아할만한 평범한 구성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있어 지루해할 시간따위는 없이 벌써부터 백광현의 활약을 보여주려 한다. 무리수가 보인다.
백광현이라는 한 개인의 성장이란 없다. 의원으로서 말을 지키는 마의에서 사람을 지키는 인의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라는 것도 없다. 의원으로서의 사명감이나 자부심도 뒷전일 것이다. 벌써부터 가문이 멸족당한 과거의 원한이 그를 옭죈다. 전통의 한방의학에 최초로 외과적 치료법을 도입했다고 하는 혁명보다 그를 통해 어떻게 원수를 갚고 원래의 자리를 찾는가가 더 우선한다. 백광현이 참 값싸게 보인다. 필자가 아는 백광현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도 드라마로서는 재미있다. 우연히 어린아이가 제방에 난 구멍을 발견한다. 손가락으로 막고, 손을 넣어 막고, 마지막에는 몸을 던져 막는다. 조승우는 물론 소년이 아니다. 그러나 극중 백광현은 아직 소년이다. 어리고 미숙하다. 그 무모한 객기로 어쩌면 지나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을 실제 밝혀내게 된다. 얼마나 짜릿한가. 앞으로도 이런 전개라면 참으로 안타까울 것이다. 마의라는 제목을 내세웠을 때는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대과를 준비하는 이성하라는 것도 참으로 생뚱맞다. 아무리 내의원에 영감이라 불리고 있어도 이명환은 의관이고 의관이란 중인이다. 허준의 후손이 없는 이유는 그가 서얼인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인 이상이면 법도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행세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배경이 필요했다. 하물며 이명환은 의원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마의의 자식이었다. 과거 학식은 물론 사대부 사이에 인망이 높았던 송익필이 어떤 이유로 은거를 선택해야 했던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판타지라면 이해한다. 백광현은 실존인물일 터다. 현종도 숙휘공주도 모두 실존인물이다. 역시 너무 나가고 있다.
한국사극의 고질적 병폐가 드러난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 시청자도 재미만을 원하고, 제작진 역시 재미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실제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어도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저 이미지만을 빌릴 뿐 나머지는 적당히 통속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해 쓰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실도 그를 위한 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역사드라마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저 시대가 조선인지? 저 곳이 한반도인지? 아쉬울 따름이다.
전형적인 드라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굳이 비판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드라마답다. 드라마로서는 재미있다. 굳이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백광현이라는 이름이 아쉽다. 조선 현종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리고 어쩌면 장차 만나게 될 시대의 크고 무거운 사건들도. 사상 유례가 없었던 참혹한 비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차라리 판타지였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비극은 취향이 아니다. 재미는 있다. 인정한다. 더 안타까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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