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드라마의 제왕 - 앤서니 김의 위악과 드라마의 상투성...

까칠부 2012. 11. 27. 08:27

상투적이다. 하기는 공중파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가 보는 드라마다.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는 영화관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영화를 볼 수 있다. 관객은 자신이 볼 영화를 선택하고, 제작자 역시 영화관의 문을 통제함으로써 영화를 볼 관객을 특정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같은 영화가 그래서 영화에서는 허락된다. 하지만 <나쁜 남자>가 공중파에서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으면 어땠을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본성을 타고 났다. 타고난 본성이 선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누구나 자신이 선하기를 바란다. 선이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찾아낸 최소한의 룰이라 할 수 있다. 선하다는 것은 그같은 사회적 존재로서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고 그런 자신에 만족할 수 있다. 선이란 자존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사회로부터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모멸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드라마속 상황에 자신을 이입하게 된다. 자발적 동의라는 것이다. 동의란 동조다. 동화다.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드라마속에서 그것이 실재하는 사실임을 인정한다. 드라마라는 전제 위에 그것은 실제처럼 존재하고 작용한다. 그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그 안에 위치하는 것이다. 드라마 안으로 들어가 실제 자신이 드라마속 인물이 되어 그 상황들을 체험해 본다. 그렇게 여긴다. 투사라는 것이다. 마치 드라마속 인물들이 바로 시청자 자신인 것처럼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자신을 투사하여 즐기게 된다. 드라마만이 아닌 연극이나 영화, 소설 등에서 관객이나 독자들이 작품속 허구의 이야기들이 마치 현실에 실재하는 사실들인 양 울고 웃고 화내고 원망하는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곤 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 일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드라마속 주인공이 천하에 다시 없을 나쁜 놈이다. 모두가 미워하고, 모두가 원망하며, 모두가 그의 파멸만을 바란다. 아니 그 이전에 그로 인해 고통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의 입장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안된다. 대개는 선의의 피해자일 것이다. 절망과 좌절이 충분한 징벌이 되는 이들이라면 주인공을 굳이 악당으로 설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차라리 주인공에 피해당하는 선의의 피해자들에 자신을 이입하려 한다. 역시 불편하다. 그래서 장치를 만든다.

 

"그래도 알고 보니 사람의 본성은 착하더라."

 

아예 파멸하는 주인공을 통해 권선징악의 주제를 드러내려 하거나, 아니라면 결국 악역인 주인공은 두가지 필연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단지 겉보기에만 못되게 보일 뿐 본성은 원래 착했다거나, 아니면 나쁜 사람인 것은 맞는데 결국 개과천선해서 착한 사람이 되었다거나. 그리고 그같은 감추어진 본래의 선량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주인공의 파트너인 것이다. <미녀와 야수>에서의 미녀처럼. <개구리 왕자>에서 성질나쁜 왕자를 다시 개구리에서 사람으로 돌려주는 공주의 키스처럼.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해주는 것은 왕자이고, 저주에 걸린 왕자를 다시 돌려놓는 것은 공주다. 전형적인 공식이다.

 

하긴 이미 첫회에서부터 앤서니 김(김명민 분)은 자신이 드라마를 위해 외면해야 했던 퀵서비스 기사의 유족들에 대해 사비를 털어 거액의 보상금을 건네고 있었다. 당시 그를 곁에서 돕고 있던 오진완(정만식 분)이 놀랄 정도로 큰 액수였다.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그것도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까지 유족들에게 줄 필요가 있었는가? 더구나 드라마국장의 요구로 이고은(정려원 분)을 잘랐다가 다시 돌려놓는 과정에서도 앤서니 김은 굳이 새로운 드라마국장 남운형(권해효 분)의 요구인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어쩌면 지독해 보이는 겉모습은 단지 필요에 의해 선택한 위악의 가면이었고 원래는 무척 착하고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을까?

 

여기에 앤서니 김이 드라마 제작자가 된 이유에 대해 오래전 불우했던 어린시절이 잠시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 어머니마저 앞을 보지 못하고, 가난과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외롭고 서러운 일상 속에 오로지 드라마만을 위안으로 삼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후로도 앤서니 김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기까지에 대해 구구한 사연들이 파편처럼 모자이크하듯 보여지게 될 것이다. 앤서니 김의 위악은 불우한 성장과정과 타락한 현실로 인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듯이. 그리고 위로하듯 구원을 건넨다. 누구보다 올곧고 정의로운 파트너를. 앤서니 김은 마침내 잃어버렸던 자신의 본성을 되찾는다. 이고은은 앤서니 김에게 미녀이고 공주인 것일까?

 

자기만의 룰이 있다. 룰이란 규준이다. 선이다. 여기까지는 허용된다. 그러나 여기를 넘어서면 그때는 끝이다. 선(線)이란 곧 선(善)이기도 하다. 싸움은 검투사들끼리만 하는 것이다. 내 배우와 작가는 건드리지 마라. 그가 선해지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다. 보다 그가 가장 선해지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아닌 드라마일 것이다. 드라마를 위해 배우를 지키려 하고, 드라마를 위해 작가를 지키려 한다. 드라마를 위해 배우에게 위협을 가한다. 그의 선이다. 그의 정의다. 그것이 사람을 향하게 되는 날이 올까?

 

상투적이지만 그래서 재미있다. 사람은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규범을 벗어난 자신을 상상한다. 하지만 역시 그것이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다시 돌아오기 위한 선이 있다. 적당히 위악하면서도 자신을 만족시키는 선량함이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럴만한 필연이 있다. 악의로써 대립하는 적도 있다. 선의로써 곁을 지켜주고 다시 돌아오게 해 줄 누군가도 있다. 앤서니 김과 오진완의 대립은 벌써부터 흥미롭다. 아니 오진완 뒤의 제국의 회장과의 대결 또한 흥미진진할 것이다. 악의는 악의로써 맞서고 선의는 선의로서 지킨다.

 

강현민을 연기하는 최시원의 연기력이 참으로 놀랍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가? 극단의 속물을 보여주는 강현민의 캐릭터를 무리없이 소화해 보여준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데다 제멋대로이기까지 한데 밉기보다는 차라리 귀엽다. 그만큼 어색하게 걸리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순수하게 이기적이고 순진하게 계산적이며 올곧게 제못대로다. 그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아기와도 같다. 최시원이라는 배우에 대해 새삼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연기가 되는 배우이기는 했지만 강현민은 마치 그의 분신인 듯 살아 숨쉰다.

 

드라마의 내용대로라면 <드라마의 제왕>에서도 방송국이나 배우, 제작자에 의한 압력이 있었던 것일까? 극중 제작중인 드라마 <경성의 아침>의 여배우를 섭외하는 과정이 갑작스럽게 앤서니 김과 관련한 로맨스로 바뀌고 만다. 과거의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이 아직도 앤서니 김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앤서니 김의 마음은 아직 감추어진 채다. 그러고 보면 앤서니 김의 곁에는 벌써 이고은이 있다. 드라마란 멜로다. 멜로야 말로 인기를 담보하고 수입을 담보한다. 그런 상상마저 해보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드라마의 제왕>이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가 매력있다. 상투적이면서도 놓인 상황들이 흥미롭다. 유치하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이 재미있다. 강현민의 음주운전을 어머니의 응급실쇼핑과 결부지어 타개하려는 의도는 매우 절묘했지만, 그 과정에서 강현민의 어머니(박준금 분)이 보여준 한 바탕의 헤프닝은 그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롱이다. 거짓된 세상과 거짓된 진실에 대한 질타다. 그러나 심각하지 않다. 드라마인 까닭이다. 재미있자고 보는 드라마다.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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