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다. 신인이란 이제 막 프로의 세계에 발을 딛으려는 아마추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다. 당연하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줘 본 적이 없다.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로부터 냉혹한 비판을 들어 본 적도 없다. 자기가 좋다 생각한 아이디어다. 자기가 재미있다 생각해서 쓰기 시작한 이야기다. 재미없을 리 없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혼자서 만족하고 말 것이라면 그저 혼자서 즐기고 재미있어하면 그만이다. 굳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한다. 이고은(정려원 분)이 과거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앤서니 김(김명민 분)이 내민 손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드라마를 쓰고 싶다. 자신이 만든 드라마를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다만 여기서도 차이가 있다면 만일 드라마를 사람들이 보지 않거나 보고서도 재미없다 말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인가? 작가 자신의 부족함인가? 아니면 대중의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인가?
앤서니 김이 이고은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배우이기 이전에 성민아(오지은 분) 역시 그녀의 작품을 읽은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독자가 이고은의 작품에 대해 '주제의식 과잉'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껏 칭찬만 들어왔던 이고은으로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성민아 또한 독자이며 장차 시청자가 될 것이다. 최소한 성민아가 어떤 부분에서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가는 알아야 결과에 대해서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작품이기에 지킬 것만을 고집하다 보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납득하지 못한다.
"이게 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야!"
정히 자신이 처음 의도한대로 고집하려 한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도 스스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청률이 낮아 손해를 보고 조기종영을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탓이다. 자기 책임이다. 댓가를 치른다. 자신이 쓴 대본으로 원고료를 받는 것처럼 그 대본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에 따른 패널티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작가야 그렇게 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으면 된다지만 그로 인해 손해를 입어야 했던 제작자나 방송국, 배우들은 어찌할 것인가? 작품이 망하면 스탭들 또한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다.
성민아의 오만과 독선이란 바로 그같은 자신감에서 시작된다 할 수 있다. 강현민(최시원 분)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앤서니 김은 성민아에 대해 '프로'라 단언한다. 설사 이고은의 대본이 자신의 요구대로 고쳐지지 않더라도 일단 출연하기로 계약을 한 이상 배우로서 드라마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녀는 스타다. 그것도 톱스타다. 오로지 톱스타로서의 그녀의 이름값만을 보고 막대한 개런티를 주고 그녀를 캐스팅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에 따른 책임이 주어진다. 오만한 만큼 실패했을 경우 그 댓가는 더 가혹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제멋대로인 것은 그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본이 주어지더라도 자신이라면 드라마를 성공시킬 수 있다. 최소한의 결과를 보장할 수 있다. 성민아나 강현민이나 그래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와중에도 최소한의 선만은 넘지 않는다. 결국 성민아와 강현민이라는 톱스타의 기싸움이라는 것도 자신만이 드라마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고은이 대본을 고치든 고치지 않든 대본이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한다.
이고은의 성장통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자기가 좋아서 드라마 대본을 쓰던 아마추어에서 자신의 대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드라마와 드라마의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있는 프로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제작자와 감독과 방송국과 배우 모두를 만족시키며 궁극적으로 시청자를 만족시킨다.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다면 상대를 납득시킨다. 상대를 납득시킬 수 없다면 자신이 납득한다. 어중간한 것은 없다. 그것이 프로다. 설사 터무니없는 요구가 있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수용하는 것 역시 프로의 능력이다. 그 능력을 시험받았다. 그저 자신의 세계에 갇혀 그것만을 고집하는 애송이인가, 아니면 자신의 작품을 책임질 수 있는 프로인가.
사실 앤서니 김도 시험받고 있기는 했다. 아니 모두가 시험받았다. 앤서니 김과 구형목 감독(정인기 분)이 서로 반목하고 있을 때도 남운형(권해효 분) 국장은 그것이 제작자로서의 능력이 아닌가 묻고 있었다. 앤서니 김은 앤서니 김대로 구형목 감독에게 그것이 최선인가고 묻고 있었다. 앤서니 김이 강현민에게 화내는 이유다. 자신의 드라마에 해가 되는 행동만은 하지 마라. 그곳은 정글이다. 프로라는 이름의 치열한 정글이다. 자격이 없다면 도태된다. 살아남지 못한다. 앤서니 김은 그런 정글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애송이 이고은이 자신의 작업실을 나와 만나게 된 현실이었을 것이다. 작업실에서 단지 이고은 자신의 상상에 의해서만 쓰여지던 대본이 현실의 다양한 입장과 이해들과 만나 드라마로서 구체화된다. 서로 다른 추구와 가치관들이 첨예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가운데 그녀 자신도 그 한 조각이 되어 그 속에 포함된다. 아직은 한 발 걸치고만 있다. 아직은 프로라기보다는 데뷔의 기회를 잡은 신인이며, 운좋은 풋내기에 불과하다. 현실은 그녀를 실망케 하고, 좌절케 하고, 끝내 지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그런 현실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앤서니 김에게 드라마가 자아찾기라면 이고은에게 드라마란 성장기다. 그래서 앤서니 김의 등뒤에는 이고은이 있고, 이고은의 앞에는 앤서니 김이 있다. 이고은이 가고자 하는 저 앞에 앤서니 김이 있고, 앤서니 김이 지나온 저 뒤에 이고은이 있다. 그들은 이미 함께 하고 있다. 만나고 어쩌고 할 것 없이 벌써 함께 가고 있다.
우여곡절이 많다. 드라마제작을 위한 투자를 받아내는 과정에서부터, 드라마의 편성권을 따내기 위한 치열한 로비전에, 스타배우를 잡기 위한 처절하기까지 한 노력들까지. 그렇게 겨우 편성권을 따냈더니만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겨우 제작에 들어가는가 싶은 순간에 다시 배우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느라 하마트면 제작발표회가 엎어질 뻔했다. 이번에는 투자자가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며 나선다. 흔히 있는 일이다. 순간의 충동으로 투자를 결정하고 이내 후회하며 투자금을 되돌려받고자 하는 경우.
참 드라마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래서 드라마가 된다. 위기가 있고, 갈등이 있고, 그에 따른 긴장이 있다.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작은 성공들도 이어진다. 작가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만드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는 없을 것이라고. 어쩐지 실제 있을 법한 사건들이 드라마 제작이라고 하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며 시청자를 희롱한다. 기분좋은 희롱이다. 마음껏 농락당하며 그 재미를 즐긴다.
최시원의 연기는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성민아역의 오지은은 톱스타의 캐릭터를 연기하기에는 아직 아우라가 부족하다.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든 드라마속에서 그녀는 국내 굴지의 기획사 대표를 상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톱스타다. 박근형의 악역연기는 전율이 일 정도다. 그를 맞상대할 김명민의 파이팅을 빌어본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50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풍수 - 권력을 향해 몰려드는 서로 다른 욕망과 바람들... (0) | 2012.11.29 |
---|---|
마의 - 현종의 담낭결석과 백광현의 위기, 무리수를 두다. (0) | 2012.11.28 |
마의 - 이병훈표 사극, 전형적이어서 재미있는 이유... (0) | 2012.11.27 |
드라마의 제왕 - 앤서니 김의 위악과 드라마의 상투성... (0) | 2012.11.27 |
전우치 - 피곤한 일상에 편하게 쉬며 즐기는 오락드라마... (0) | 201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