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좋은 돼지고기에, 신선한 야채, 그리고 최소한의 조미료만을 사용하여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담백한 조리법으로 요리를 한다. 그런데 하필 짜장면이다. 과연 특유의 캬라멜색소와 단 맛과 화학조미료가 주는 감칠맛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그런 짜장면을 좋다고 찾아먹고 할까? 물론 맛이 있으면 먹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짜장면으로서가 아니다.
한때 하얀국물 라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도 아니다. 바로 한 해 전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조금 성급하게 단정해 말하자면 라면의 맛이란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재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라면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소금과 고추가루를 비롯한 강한 맛을 내는 양념들이다. 한 해 억 단위로 생산되고 판매되는 인스턴트 라면이다. 특정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다양한 개성의 입맛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인스턴트 라면인 것이다. 특정한 개인이 아닌 보편적인 다수가 공통적으로 '맛있다'고 여길 수 있는 맛을 찾아야 한다. 자극적인 라면국물이란 바로 그와 같은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양념은 원래 맛있어서 양념이라 하는 것이다.
통속드라마란 어쩌면 그러한 짜장면이나 인스턴트 라면을 닮아 있을 것이다. 영화와는 다르다. 소설과도 다르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 작품을 직접 골라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여 본다. 충분히 선택할 수 있고 관객이나 독자 개인의 개성이 발현될 여지가 높다. 작가 역시 그같은 관객이나 독자의 개성을 고려하여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작품을 소신을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공중파 드라마란 TV 전파를 수신하는 불특정다수의 시청자를 그 대상으로 한다. 누가 대상이 될 지 알 수 없고, 시청자 자신 또한 TV앞에 앉아 채널을 고정하는 것으로 선택을 마무리한다. 아무때고 간편하게 찾아 먹기 위해서는 보다 보편적인 입맛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들은 비슷한 구조와 구성을 갖는다. 주제마저 천편일률적이다. 노리는 시장의 규모가 다르다. 미국을 넘어 전세계를 헐리우드 영화의 시장으로 여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가치관을 갖는 수많은 다양한 개성과 취향들이 모두 거부감없이 만족하며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 폭은 매우 좁다. 지금도 일본에서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만화잡지 <소년 점프> 역시 우정과 노력, 사랑이라는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만화의 주독자층인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 사이의 아이들에게 물었다. 가장 마음에 와 닿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고. 비록 구조와 구성, 심지어 주제마저 비슷한 경우가 많지만 그래서 <소년 점프>는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만화잡지가 되었다.
달리 바꿔 본다. 드라마에서는 역시 우정보다는 사랑이 어울린다. 우정은 안정적이다. 우정에는 그다지 큰 굴곡이 없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안정감이 없다면 그것은 우정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다. 당장 죽고 못사는 커플도 어느 순간 틀어져 원수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전혀 상관없이 지나치던 누군가가 자신의 연인이 되고, 문득 스치고 지난 누군가를 짝사랑하여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질수도 있다. 드라마틱하다. 안타깝고 간절한 우여곡절이 있다. 잘생기고 아름다운 배우라면 당연히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옳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인 자신의 매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은 드라마속 인물에 자신을 이입시키곤 한다. 역시 그를 위해서라도 우정보다는 사랑 쪽이 시청자 입장에서도 느낌이 남다르다.
노력은 승리가 대신한다. 승리는 성장이 대신한다. 노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승리가 중요하다. 이기고 싶다. 이겨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 무한경쟁시대다. 모두는 가혹한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며 승자가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패자는 도태된다. 패자는 무능하며 도덕적으로도 불성실한 자격미달의 존재다. 승리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승자가 되어 다른 이의 위에 서고, 그렇게 조금씩 자신을 높여간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같은 성공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당장의 좌절이나 실패도 참고 견디며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당장의 위기나 어려움은 있어도 항상 패배하지 않고 승리한다. 말했듯 드라마속 주인공이란 시청자 자신의 대신이다. 만족은 희열이 된다.
참으로 드라마의 구성이라는 것이 단순하다. 위기가 있다. 주위로부터의 악의로 인해 주인공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주인공은 초인적인 의지로 그것을 뛰어넘고 자신을 향한 악의들을 좌절시키고 만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인공은 한 걸음씩 차근히 올라간다. 도대체 백광현(조승우 분)이 뭐라고 일개 천민에 불과한 그에게 한 나라의 공주(김소은 분)며, 사대부가의 수절과부(조보아 분)마저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가. 혜민서의 의녀들도 하나같이 백광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기는 조승우는 잘생겼다. 매력적인 배우다. 기왕에 매력적인 배우를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어려움이나 위기는 있어도 패배하는 법 없이 항상 승리를 거두다. 남자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여자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을 이입하여 그 쾌감을 공요하기가 보다 수월하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상에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마음놓고 백광현의 승리와 성장을 이입하여 즐길 수 있다. 높은 시청률의 이유다. 드라마는 즐겁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아쉬운 것이다. 백광현이라면 말하자면 최고등급의 한우와 같을 것이다. 일개 마의에서 임금의 건강을 관리하는 어의가 되었다. 스스로 독학으로 말을 치료하는 법을 익혀 그것으로 전통의 한의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더구나 일자무식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몸으로 책 한 줄 읽지 않고 의원으로 입신했고, 지방의 수령까지 지냈으며, 왕으로부터는 노의의 칭호를 들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결과로 지나치게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던 드라마는 한결같이 시청률에서 참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일부 마니아들로부터는 호평을 들었을지 몰라도 상업드라마로서는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시청률이 나와주어야 광고등을 통해 제작비를 보전하고 다음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제작비가 들어가고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된다.
평범해졌다. 굳이 백광현이어야 했었는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최고급 원두를 사용해서 커피를 만들었어도 그것을 대규모로 유통시키려 할 때는 커피 본연의 맛과 향만으로는 부족한 법이다. 커피맛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맛있게 여겨져야 한다. 커피 향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그 향이 전해져야 한다. 대량으로 생산되어 판매되는 김치란 맛이 한결같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썼어도 짜장면은 짜장면이다. 아무리 독특한 재료를 사용했어도 라면은 라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면 굳이 원두여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기는 그래서 원두를 사용했다고 하면 소비자 입장에서 맛이 더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백광현이어서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재다. 도구이며 재료다.
드라마는 재미있다. 그것 하나는 분명하다. 사랑을 한다. 그 이전에 사랑을 받는다. 백광현이란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이다. 백광현이라는 캐릭터를 그를 사랑하는 주위의 여인들을 통해서 강조하고 확정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강지녕(이요원 분)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지녕과 이성하(이상우 분)와의 관계는 그렇게 백광현과 주위의 여인들처럼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성하는 짝사랑을 한다. 강지녕은 백광현을 바라본다. 이성하는 백광현의 승리를 확인시켜줄 대상에 불과하다. 드라마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백광현이다. 단지 시청자는 백광현만을 따라가면 된다. 편하다.
그런데 승리한다. 위기가 있지만 승리한다. 어려움이 있지만 승리하고 만다. 차라리 주위의 심지어 내의원 의관들마저 한낱 의생에 불과한 백광현에 비하면 어리석고 무능하다. 백광현이 처음 놓는 침으로도 치료한 환자를 의관은 살리지 못했고 심지어 산 사람을 죽었다 시체실에 갖다 놓기까지 했다. 무의식중에 있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능력있다. 나는 충분히 대단하다. 그런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세상이 어리석다. 세상이 잘못되었다. 고주만(이순재 분)이 그런 백광현을 견인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명환(손창민 분)과 그를 질투하는 의생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와도 같다. 하지만 승리한다. 승리하고 한발짝식 앞으로 위로 나아간다. 걸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 좋다. 깔끔하게 한 주를 넘기고 부담없이 다음주를 기다린다. 다음에도 백광현은 승리할 것이다.
어찌보면 유치하기도 하다. 특히 백광현과 강지녕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란 작가가 무얼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유치한 것이 많다. 하지만 그래서 통한다. 유치한 대신 직접덕이다. 거치는 것 없이 직접 시청자에게 와닿는다. 무엇이 재미있는가를 안다. 재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룬다. 유치하더라도, 평이하더라도, 그래서 뻔하고 진부하더라도, 그러나 재미만 있으면 된다. 시청자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일 게다. 이렇게 비판적인 기사를 쓰고 있는 자신도 그래서 드라마를 볼 때는 생각없이 재미있게 본다.
이병훈표 드라마의 한계이며 가장 큰 강점일 것이다. 여전히 이병훈의 드라마가 대중에게 먹히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톡속드라마다. 불특정다수의 시청자가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기다려 보는 드라마다. 무엇이 중요한가.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 라면을 먹으며 요리를 찾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짜장면은 짜장면일 뿐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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