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이성이란...

까칠부 2013. 1. 9. 09:38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합리적인 사고? 논리적인 추론? 물론 그런 것들도 이성의 범위 안에 포함되기는 한다. 다만 보다 깊이 들어가보자. 무엇을 사람들은 합리적이라 논리적이라 말하는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어떤 때 쓰이는가?


이성이 도덕의 전제가 되는 이유다. 이성적 판단이 곧 도덕적 판단의 전제가 된다. 객관이라는 말 그대로다. 어느 주관에도 속하지 않는 관점이라는 뜻이다. 나의 눈이되 그 눈은 다른 곳에서 심지어 자신마저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 내게도 속하지 않고 네게도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일반이다. 달리 보편이라 부르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모두를 아우르는 것. 


사흘을 굶었다. 너무 배고파서 이대로 서 있을 힘조차 없다. 그런데 문득 저 앞에 떡을 내놓고 파는 노점이 보인다. 먹고 싶다. 간절히 먹고 싶다. 그런데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어째서?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일단 아무렇게든 저 떡을 먹어야 배고픔이 가실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떡을 파는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 자신이 아닌 떡장수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떡장수 자신의 판단인가? 어쩌면 그 떡장수는 떡을 훔쳐먹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먹으라며 떡을 줄 수도 있다. 바로 그같은 떡장수 자신의 판단마저 배제한 어느 가상의 지점인 것이다.


보다 다수의, 보다 일반적인, 보다 보편의, 그래서 보다 다수의 입장이 공유점을 찾는다. 그것은 어느 개인이 주장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입장을 취합하고, 서로의 주장을 하나로 모아서 그 가운데 공유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보다 보편의 가치와 이익에 더 부합하는가? 


그래서 이성이란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도덕인가? 무엇이 정의인가? 인간의 도덕은 그렇게 발달해 왔다. 인간의 인지가 넓어지면서, 더 많은 대상들을 상대로 그같은 허구의 지점을 찾아내려 노력하면서, 보복강간이 당연하던 사회도 있을 테지만 보다 넓은 세계에서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 된다.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상대에게도 같은 행위를 돌려준다. 그러나 결국 그같은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는 이들조차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이성에는 정답이 없다. 바로 그 답을 구하는 과정이 이성이다. 무엇이 옳아서가 아니라, 더 옳은 무언가를 찾으려 노력하기에 그것이 이성이다. 그것이 정의이고, 그것이 도덕이다. 더 선하고자 하는 것. 더 바르고자 하는 것. 더 많은 이들에게 이익이 되고자 하는 것. 하나의 답만을 가지고 고집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아집이 되고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토론하고 논쟁하고 그래서 끝없이 다투는 과정은 이성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성이란 그래서 시끄러운 것이다.


이성적 판단이라 하면서 다른 의견을 막는다. 정의와 도덕을 내세워 다른 판단을 무시한다. 그러면서 어디서 주워읽은 구절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 본다. 내가 먹물진보를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성은 나아가는 과정이지 도달한 결론이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이성이란 신의 영역이다. 누군가에게 속하게 된 이성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한 집착이 되고 욕망이 되어 버린다.


다투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바로 저 어딘가에 그토록 간절히 찾던 그것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끝날 때쯤 인간은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성이란 다른 말로 관용이라 불리우기도 하는 것이다. 관용이란 자신이 납득하지 못한 더 넓은 세계에 대한 허용이다. 이성만이 그것을 허용한다.


인터넷이 때로 쓸데없이 과열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절대시한다. 그 감정을 위한 논리를 이성으로 착각한다. 그 논리의 적합성을 도덕이나 정의로 혼동하기 쉽다. 결국은 감정이다. 집착이고 욕망이다. 인간은 때로 쓸데없이 머리만 좋다. 이성이 안타까운 이유다.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