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스포일러라면 질색하는 이유일 것이다. 결과를 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미리 알아 버린다. 보지 않고도 내용을 다 알아버린다. 얼마나 효과적인가. 궁금할 것도, 그래서 기대할 것도, 놀라거나 배반당할 걱정도 없다. 굳이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한 번 본 내용인데도 재미있다.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반추하듯 작품을 다시 감상하며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까지 다시 끄집어낸다. 혹은 처음 보았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들이 새로운 재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같은 기억조차 없다면 뻔히 아는 내용이 나오기까지 그 과정을 지루하게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의 모든 의도가 남김없이 보여지며 설렘도 긴장도 사라져 버린다.
이를테면 전지적 박수하(이종석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장혜성(이보영 분)의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그냥 보기만 해도 안다. 궁금해 할 일도, 그로 인해 안달내거나 설레어 할 일도, 오해하거나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 역시 전혀 없다. 그나마 기억이 돌아온 사실을 속이고 있기에 그에 맞춰 행동하느라 아주 약간의 긴장이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사이가 좋지 않던 경찰들과도 이제 서로 이해하며 웃을 수 있다. 서도연(이다희 분)의 출생의 비밀마저 서대석(정동환 분)을 멀리서 한 번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알아낸다. 황달중(김병옥 분)의 재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내(김미경 분)와의 사이를 증명할 잃어버린 딸의 존재였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서도연 아니면 장혜성이었다. 황달중이라고 하는 캐릭터부터가 드라마 초반부터 비중을 할애하여 다룰만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황달중이 잃어버린 딸에 대해서도 불필요하게 강조되고 있었다. 극중 인물 가운데 누군가 황달중의 딸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황달중의 딸일 것이다. 그리고 서대석과의 오랜 악연이 드러나는 순간 눈에 띄게 동요하는 서대석의 모습에서 어쩌면 서도연이야 말로 황달중의 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다른 드라마에서였다면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또 전혀 다른 극중 인물로써 비슷한 추론의 과정을 거쳐 그같은 진실에 도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발로 뛰고 입으로 수소문하고 귀로 듣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추리하고 그 증거들을 찾아간다.
하지만 박수하의 존재가 그같은 모든 과정들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굳이 황달중의 딸을 찾으려 헤매고 돌아다닐 필요 없이 박수하가 단지 서대석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고 만다. 다름아닌 서도연이 황달중의 딸이었다. 아니 심지어 서도연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것도 하필 서대석의 딸로 자라나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까지도 한 눈에 낱낱이 보여지고 있었다. 황달중이 누명을 쓰고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서 26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사연들 역시. 그래서 황달중의 이름을 들었을 때 서대석은 지나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달중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달중을 유죄로 만들었다.
반복된다. 역시 박수하가 기억을 잃었을 때가 재미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가 더 재미있었다. 인생이란 이와 같다.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알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한 눈에 모두 보이게 된다. 재미없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미래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알고자 하고, 알지 못하기에 오해가 생기고 갈등도 빚어진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또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없다. 민준국(정웅인 분)이 나올 때가 되었다.
민준국이 차관우(윤상현 분)를 찾아간다. 장혜성이 있는 곳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차관우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기는 민준국은 사람을 속이는 일에 능숙하다. 이미 한 차례 차관우를 멋지게 속여넘긴 바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차관우를 속여 이용하려는 것일까? 민준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장혜성과 박수하의 주위에도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장혜성과 박수하 사이의 어설픈 로맨스로 인한 긴장이 아니다. 장혜성 혼자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 그나마도 박수하에 의해 낱낱이 보여진다. 과정이 없다면 결과를 만들어내면 된다. 민준국의 존재는 두 사람 사이에 결론을 내리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참 편리하다. 민준국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너무 착하다. 장혜성에 대해 말하는 차관우나, 차관우에 대해 말하는 장혜성이나, 결국 서로에게서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고쳐나간다. 하지만 드라마가 이렇게 밋밋한데 뻔한 착하기만 한 대사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캐릭터가 지워진다. 그래도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상덕(윤주상 분)에 대해 거만을 떠는 장혜성은 장혜성다웠다. 차관우는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다. 서도연은 라이벌로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말로는 짐짓 야멸차게 쏘아대고 있지만 원래 오랜 친구 사이에도 그렇게 일부러 거칠게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로 서로 부딪히게 된다고 적이 되고 라이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로맨스로서도 많이 아쉽다. 박수하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장혜성이 몰랐더라면. 아니 시청자 자신도 역시 몰랐어야 했다. 박수하가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박수하의 캐릭터에 신비감을 더하게 된다. 그 미묘함이 더 설레게 하고 더 궁금하게 한다. 마치 오래된 일일드라마를 보는 듯 심심하기까지 하다. 너무 당연해서 그냥 익숙하다. 차관우는 무대에조차 올라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나마 초반의 좋았던 기억들이 오그라드는 듯한 장면들을 익숙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 게다. 마치 오랜 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살인자가 아니었다. 아내는 살아있었다. 아내의 독심으로 인해 황달중은 살인자가 되어 26년을 감옥에서 썩어야만 했었다. 아내의 변명이 가증스럽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차라리 그쪽이 황달중 자신에게도 더 낫지 않았겠는가. 병까지 얻었다. 3개월을 못산다 했다. 그 사실을 판사인 서대석 역시 알고 있었다. 아내를 찌르고 황달중은 서대석을 찾아간다. 황달중의 무죄를 주장하려 한다. 하필 바로 전재판에서 장혜성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칼을 휘두른 피의자의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아내를 죽인 것이 아니다. 죽인 사람을 또 죽일 수는 없다. 서도연의 정체가 밝혀지며 더욱 혼란스런 점입가경으로 들어간다. 박수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인터넷 소설 가운데 깽판물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게 주인공 마음대로다. 위기도 없고, 갈등도 없고, 따라서 긴장이나 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또한 없다. 단지 대리만족용이다. 주인공의 승리와 성공에 자신을 이입하며 현실의 우울함을 잊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드라마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남은 분량도 얼마 없는데 빠르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박수하의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직접 뛰어서 황달중의 딸을 찾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만족은 없고 단지 지루함과 지겨움 뿐이다. 그나마 장혜성이 박수하가 기억을 찾은 것을 눈치채는가 정도가 흥미의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조차 박수하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밝힌다.
민준국과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서도연과의 관계 역시 황달중이 걸려 있다. 마지막은 서대석이다. 서대석이 지금껏 믿어오던 굳은 신념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12년 전 장혜성이 겪었던 억울함을 이제는 풀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도 지루하다. 드라마가 약해지고 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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