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것은 비단 한국드라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른 나라의 드라마를 보더라도 준비가 부족한 경우 결국 신파로 빠져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첨예한 이성과 논리의 대결장이 되어야 할 법정이 눈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명백한 증거와 증언을 전제로 치밀하면서도 치열한 법논리의 대결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인정과 눈물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만다.
편하기 때문이다. 쉽기도 하다. 눈물처럼 분명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처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아버지와 딸이다. 친아버지와 친딸이다. 그러나 26년간 아버지와 딸로써 보내온 시간들이 있다. 친아버지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더구나 친아버지를 26년간이나 감옥에서 보내도록 만든 것이 자신의 아버지였다. 잘못된 판결로 인해 친아버지는 무려 26년이라는 시간을 그토록 그리워하던 딸조차 보지 못하고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었다. 그리고 그런 친아버지를 이제 다시 검사로서 법정에서 범죄자로 기소하려 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하지만 굳이 주인공 장혜성(이보영 분)이 변호사여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법정이 무대가 되지만 굳이 법정드라마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고성빈(김가은 분)이 주인공이어도 되었다. 고등학생의 신분이던 고성빈이 우연히 살인자로 징역을 살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황달중(김병옥 분)과 우연히 얽히게 된다. 재판과는 별개로 황달중이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딸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박수하(이종석 분)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재판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침내 밝혀진 진실에 모두는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차라리 서도연(이다희 분)이 끝까지 냉정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야멸찰 정도로 당당하게 검사로서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려 한다. 자신은 검사다. 검사로서 범죄자를 기소하여 법에 의해 처벌받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것이 비록 기만일지라도. 눈물을 흘리더라도 장혜성의 집요하면서도 치밀한 논리에 허물어지면서 마지막 순간 눈물을 토해냈어야 했다. 서도연의 눈물은 다름아닌 법정이 만들어낸 눈물이다. 그러나 법정은 단지 눈물을 위한 무대에 불과했을 뿐이다.
박수하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부터 예감했어야 했다. 너무 방심했다. 그만한 준비와 각오는 되어 있으리라 여겼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이용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법정드라마를 만들어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첫에피소드에서부터 오히려 박수하의 특별한 능력은 드라마를 흔한 신파로 만들기 위한 가장 쉽고 편리한 수단에 불과했었다. 과정을 생략한 채 박수하에 의해 모두 밝혀진 사실들을 전제로 결국 시청자의 감정에 호소하려 한다. 그나마 얻은 것이라면 그럼에도 박수하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어느새 부쩍 성장해버린 국선전담변호사 장혜성 정도일까?
서도연이 황달중의 친딸임이 밝혀지기까지, 과거 서대석(정동환 분)과 황달중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알게 되기까지, 서도연이 어떻게 서대석의 딸이 되었는가를 알아내가는 과정에서도 또한,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이 있었다. 그것을 철저히 증거와 논리로써 허물어뜨린다. 서대석이 사실을 인정하고 서도연이 진실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여전히 서도연에게 아버지는 서대석이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남는 것은 눈물 뿐이다. 황달중마저 서도연이 자신의 딸인 것을 알고 있다. 서도연은 어째서 그때 황달중을 찾아가야 했던 것일까?
주제는 의미심장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서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들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거부한다. 저항하며 반발한다. 애써 부정하려 한다. 그리고 영원히 진실과 등을 돌린 채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대석이 그렇다. 그는 진실을 바로잡을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예 무시하려 한다. 없었던 일처럼 그렇게 애써 외면하고 지나가려 한다. 하지만 마침내 인정하고 만다. 모든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검사로서 친아버지를 기소하고, 그럼에도 자신의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친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한 서도연은 얼마나 대단한가. 용기다. 강한 것이다. 박수하도 강해지려 한다. 비로소 그동안 묻어두려고만 했던 아버지의 진실에 다가갈 결심을 한다.
장혜성도 그랬다. 과거의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나 장혜성 역시 현실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했다. 그때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가 증언한 사실에 대해서. 그보다는 자신이 거짓을 말한 자체에 대한 후회였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녀는 스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자신의 신념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신에 대한 기만과 모독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유롭다.
박수하가 어른이 된다. 아이는 어른이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한다. 장혜성은 연인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대상이다. 어째서 박수하는 어머니에 대해 한 마디도 않고 있는가. 장혜성의 어머니가 살해되어 사라지며 장혜성과의 관계도 급속히 진전된다. 장혜성에게는 엄마에 대한 지독한 컴플렉스가 있다. 엄마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을 박수하에 대한 모성으로 대신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 역시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어울리는 커플은 아니다. 너무 잘 어울려서 앞날이 불안하다.
법정드라마는 실종되었다. 첨예한 법정에서의 진실공방은 서도연의 눈물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서도연이 운다. 시청자도 울기를 바랐을 것이다. 황달중이 유죄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째서 유죄이고 어떤 이유로 무죄인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고성빈과 충기(박두식 분) 사이의 치기어린 대화로도 충분하다. 박수하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여유없는 드라마제작 일정 역시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많은 요소들을 고료해 치밀하게 배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물이 차라리 쉽다. 이해하기도 쉽다.
평범해졌다. 신파란 평범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장르를 뛰어넘는 것이다. 장르가 사라졌을 때 그것을 신파라 부른다. 가장 가까운 인간의 본연의 감정이다. 슬프다. 안타깝다. 잠시 이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인가를 잊는다. 황달중을 동정하고 서도연을 연민한다. 변호사인 장혜성은 방관자로 전락한다. 법정은 그저 거들 뿐. 기대가 안타깝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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