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이 뒤바뀌어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상식이 거짓이 되고 기만이 정의가 된다.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아마 한이수(김남길 분)의 아버지 한영만(정인기 분)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하던 광주에서 그는 누구보다 잔인하고 지독한 인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상황을 견디기에는 너무 약했던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묻혀있던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천영보에서부터 한영만까지. 어쩌면 오준영(하석진 분)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저 모른 척 현재에만 충실하려 한다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탓을 지우지 않고, 자신도 역시 굳이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은가. 아리따운 아내와 국내굴지의 호텔체인인 가야호텔의 본부장이라는 위치, 아버지는 검찰로써 서울중앙지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할아버지는 모두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양심적인 기업가다. 굳이 아픈 진실을 들추어가며 지금의 행복을 들쑤실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결국 오준영도 알게 된다.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준일 것이라고. 한이수가 과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그것이 가장 상식적이다. 그리고 가장 받아들이기도 쉽다. 미워할 수 있다. 원망하고 거부할 수 있다. 과거의 기억들을. 과거의 인연들을. 지금 조해우(손예진 분)의 곁에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한이수가 돌아올 자리는 이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한 편으로 아버지가 자신이 써서 보여준 '조'라는 성에 반응을 보였을 때 그는 장인인 조의선(김규철 분)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설마...
아버지이기에 오히려 용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매몰차게 비난하고 돌아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다. 하지만 조상국(이정길 분)은 다르다. 조해우가 도리어 조상국에 대해 냉정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상국은 자신의 할아버지다. 그래서 아버지의 잘못은 쉽게 인정할 수 있었으면서 조상국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이려 했으니 원수다. 조해우의 할아버지다. 조해우에 대한 최근의 배신감까지 더해진다면 극단적인 선택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실주의자다. 과연 그는 자신이 딛고 선 현실을 부수고 과거와 현재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한이수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한이수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저 말로만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런 참혹했던 시절이 있었다. 조상국이 천영보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복수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치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인의 자식으로서 주인을 밀고하고 마침내는 마을까지 불태우고서 주인의 아들로 위장했다. 남의 이야기다. 설마 아버지 한영만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을 줄이야. 모든 아들에게 아버지란 가장 든든하고 가장 완벽한 존재일 것이다. 모든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 어른이 된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동지라 생각했다. 같은 원한을 가진 동류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찾아갔고 형제가 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정작 김수현(이수혁 분)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조상국도 최병기도 아닌 한이수 자신의 아버지 한영만일지도 모른다. 김수현의 아버지 강희수를 고문하고 어린 김수현과 생이별하도록 만들었다. 김수현도 그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바로 직전까지 친형제나 다름없다 여겼던 상대가 사실은 원수의 아들이었다니. 배신당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아니 진실에게. 진실의 잔인함에. 조해우에 이어 이들 역시 딛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게 된다. 더구나 한이수는 자신의 복수에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한영만의 죽음을 되갚아주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복수의 주체가 다시 복수의 대상이 된다. 과연 한이수의 복수는 옳은가?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고 그것을 복수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가? 그렇다고 복수따위 묻어버리라는 오준영의 말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와닿지 않는다. 오준영에게도 시련이 주어진다. 아버지를 다치게 한 범인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돌아보지 않는다. 더 이상 돌아볼 곳따위 없다. 정의가 사라졌을 때 복수는 그저 사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한이수는 복수를 하려 한다.
진실을 바로잡겠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친일파 청산을 외치던 이가 친일파의 후손이었다. 독재타도를 외치는데 알고 보니 자신도 역시 독재정권의 수혜자였다. 방관자이고 동조자였다.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오준영처럼 없었던 일로 그저 모른 채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일은 과거에 묻고 오로지 현재만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일 것이다. 진실로 상처입고 만다. 조상국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국민의 현명함을 믿는다. 누구도 진실할 수 없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진실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다. 자신은 진실하다.
기대한 이상으로 스케일이 커지고 있다. 단순한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보다 크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가 있다. 불행했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수많은 군상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리된 젊은 세대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를 알지 못한다. 천영만의 진실도, 안영만의 과거도, 그들이 살아야 했던 시대들에 대해서도. 그러면서도 쉽게 심판을 말하고 단죄를 말한다. 묻는다. 진정 각오가 되어 있는가.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끝내 허물어지던 한이수처럼.
과연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진실을 마주할 각오가. 진실과 싸워나갈 결심이. 심지어 진실을 위해서 지금의 평온과 안락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의 행복을 등지고 수많은 오해와 편견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럼에도 진실을 밝히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서 조해우는 무미건조하다. 어떤 갈등속에서도 그녀는 오로지 한 길만을 가고자 한다. 그녀는 강하다. 갈등하지 않는 섬세한 갈등을 손예진이라는 배우는 너무나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다. 조해우의 존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된 한이수와 친형과도 같던 한이수의 진실을 알게 된 김수현, 아버지와 조상국 사이의 진실을 알게 된 오준영, 중심에 조해우가 있다. 조상국이 있다. 조상국에게서 시작해 조해우에게서 끝난다. 요시무라 준이치로도 남아 있다. 조해우가 한이수를 구하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가고 있다면, 한이수는 조해우마저 뿌리치고 다시 깊은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것을 김수현이 본다. 오준영이 남았다. 조상국은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서 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벽처럼.
젊은이들을 조롱한다. 그들의 섣부름을 비웃는다. 조해우조차 조상국을 두렵게 만들지 못한다. 아직 어리다. 아직 미숙하다.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모든 시대를 거쳐왔고 모든 진실들을 경험해 왔다. 그야말로 불행했던 모순된 시대가 낳은 괴물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옳았다. 그것이 현명했다. 그는 마침내 승자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가로 스스로 정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산다. 그를 극복해야 한다. 아버지 한영만의 과거 앞에 한이수는 무릎꿇고 만다. 과거는 현재의 족쇄다. 오준영도 조상국에 대해 알게 된다. 나아가야 한다.
역사를 관통해 지금의 젊은이들이 서로 만난다. 과거의 굴레를 짊어진 채 힘겹게 현재를 살아간다. 싸우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하면서. 영합하기도 한다. 지금에 주저앉거나, 아니면 과거에 사로잡히거나, 끝끝내 모든 것을 딛고 앞으로 나가거나. 숙제다. 복수인가. 정의인가. 조해우가 손을 내민다. 한이수는 홀로 걸어간다. 끝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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