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함의 성찬이다. 출생의 비밀과 이유없는 반항, 그리고 가난의 비참함. 그래도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인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서러움이 밀려든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아주 멀리 도망쳐 버리고 싶다. 언니를 찾아간다는 것은 단지 핑계였다. 아니 언니야 말로 그녀가 도망치고 싶은 바로 그곳이었다. 미국에서 대학까지 다닌다는 언니였다. 미국에서 남자까지 만나 이번에 결혼도 하게 되었다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멀리 바다건너 다른 나라,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부유한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미국이었다. 그런 나라에서 공부도 하고 결혼까지 한다.
차은상(박신혜 분)의 꿈이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먼 다른 나라에서 지금껏 지긋지긋하도록 자신을 옭죄던 불운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꿈을 꾸어보고 싶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어머니도 자기 힘으로 편히 모시고, 세속적이지만 현실적인 꿈이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현실의 좌절과 절망이 현실 그 자체를 꿈꾸도록 만든다. 저기 어딘가 자기에게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현실이 존재할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대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손이 닿지 않는 먼 저곳에 자기가 꿈꾸는 그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던 언니는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하며 술주정뱅이와 동거하고 있었다. 대학은 가 본 적도 없다고 했었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정도였을 것이다. 기회의 땅이라지만 아무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첩의 자식이라고 쫓겨나듯 미국으로 건너간 김탄(이민호 분)이 누리는 호사스런 생활이 끝내 동생이 가져온 돈을 억지로 빼앗아 도망치는 언니의 비루한 처지와 비교된다. 남은 것은 아무데도 갈 곳 없이, 영어마저 한 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비참한 차은상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장면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조차도 사실 상당히 오버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가사도우미 급여수준이 모녀가정에서 2식구 살기에 부족할 정도로 형편없이 낮지 않다. 더구나 차은상 자신도 이것저것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돈을 벌고 있다. 먹다 남긴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지 않은 이상에는 덜어내고 남은 음식을 싸오는 정도일 텐데 그런 식으로 반발하는 것도 상당히 낯설다. 철이 없다기에는 어려서부터 일을 해서 돈을 벌어왔으니 세상물정을 모른다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주변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벌써부터 어학연수를 떠나는 윤찬영(강민혁 분)이나, 연예기획사 대표의 딸로 세상에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아가씨 이보나(크리스탈 분)나, 하기는 엄마 박희남(김미경 분)이 일하고 있는 제국그룹 일가 역시 그녀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넘치도록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녀의 절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마치 현실의 누군가를 보는 것 같다. 더 부유한, 더 잘나가는 누군가를 의식하느라 한없이 불행해져만 가는. 그런 차은상과 같은 이들을 위한 판타지 동화다. 어느날 불행에 지쳐 있던 그녀에게 구원과도 같이 왕자가 찾아온다.
정신이 없었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많았고, 각각의 사연까지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속도까지 빨랐다. 무슨 사정인가 살피기도 전에 벌써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리가 되었다. 김탄은 제국그룹 회장의 서자였다. 김탄의 어머니 한기애(김성령 분) 아직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제국그룹 회장의 첩이었다. 유라헬(김지원 분)과 최영도(김우빈 분)은 결혼을 발표한 서로의 부모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 최영도는 비뚤어져 있고 유라헬은 반항하는 중이다. 유라헬과 김탄은 그리고 현재 약혼중이다. 결국은 김탄의 형 김원(최진혁 분)까지 모습을 보였으니 제국그룹 내부의 사정도 중요하게 다뤄질 듯하다. 차은상의 친구 윤찬영의 아버지 윤재호(최원영 분)가 제국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이다.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설정이다. 그래서 편하기도 하다. 아예 제작발표회에서 통속드라마의 바통을 물려받겠다 드러내놓고 선언하기도 했었다. 마음껏 우겨넣는다. 굳이 친절하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도 이해한다. 그래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남은 것은 세부적인 묘사다. 뻔한 설정과 흔한 구성과 전개로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캐릭터의 싸움이다. 드라마를 이끌어갈 김탄과 차은상 두 캐릭터의 완성도 - 나아가 이민호와 박신혜라는 두 주인공의 연기가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영상도 그다지 썩 세련되거나 깔끔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배우의 연기는 눈에 들어온다. 이민호는 더 멋있어졌다. 박신혜는 이제 눈물 한 방울로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령의 철없는 연기와 김미경은 아련할 정도로 무덤덤한 엄마의 연기는 이들의 드라마의 중심임을 알게 한다. 중견의 힘이다. 얼마나 김탄과 차은상의 캐릭터가 설득력을 얻는가. 그들의 이야기가 시청자들과 교감할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의 시청자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겠지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청자의 호기심과 동경의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투사에 의한 공감이며 대리만족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비판할 만한 부분은 아직까지는 없다. 양해해야 할 부분이다. 오히려 지켜봐야 할 것은 통속을 넘어 식상하기까지 한 뻔한 설정과 흔한 구성을 가지고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버무러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출발은 무난하다. 특별히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매력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부분이야 말로 제작진이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일 것이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신데렐라에게는 신데렐라 컴플렉스가 없었다. 차은상에게도 아직까지 신데렐라 컴플렉스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컴플렉스는 보인다. 그러나 드라마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단연 신데렐라 컴플렉스일 것이다. 신데렐라는 불행하지 않다. 차은상은 불행하다. 아마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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