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전 일이다.
지하철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갑자기 주저앉으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어쩌나 하고 있는 가운데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한 사람이 더 도와줘서 택시를 잡아탈 수 있는 곳까지 옮겨드리게 되었다. 제법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생겼다.
올라가는 내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폐를 끼쳤다. 심지어 자기가 늙고 뚱뚱하고 못생겼다. 아마 진심이었을 테지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마 서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버려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를 위한 것인데?
"나를 위한 것이다!"
누군가 나보다 앞서 아주머니를 부축하려 했다면 나는 그냥 구경꾼으로 남았을 것이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면 일부러 나서서 수고로움을 감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불편했다. 그래서 내가 해야만 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자신이 시켜서. 누가 무어라 할 것이 아니다. 미안할 것도, 죄송할 것도, 고마울 것도 없다.
요즘 집 근처와 일하는 곳 근처에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준다. 그런데 시간이 맞지 않아 누가 와서 먹는지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연히 아무라도 와서 먹으면 - 아니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해도 지나가면서 밥이 줄어든 것만 확인해도 그냥 기분이 좋다. 고양이가 내가 살갑게 대하거나 고마워해서가 아니라 밥을 주고 그 밥을 먹는 그 자체로 나 자신이 즐거운 것이다. 여전히 나만 보면 도망가고, 가까이 다가가면 하악질을 해도 그 행위 자체로 만족을 얻는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란 어쩌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댓가를 누구로부터 받는가. 당연히 시키는 사람에게서 받는다. 나 자신. 굳이 고마워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어떤 보답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 자체로써 스스로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 아니더라도 분명 그대로 지나쳤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굳이 원치도 않는 선의를 베풀 필요는 없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 최초로 가장 명징하게 설파한 이가 바로 맹자일 것이다. 스스로 분별할 줄 알고 부끄러운 것을 안다. 남을 가엾게 여길 줄 알며 자기를 양보할 줄 안다. 옳지 못하기에 부끄럽고, 다른 이의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기기에 불편해지며,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를 위해서? 바로 자기를 위해서. 행위 자체가 곧 목적이다. 선이란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된다.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고 주위에서 하나같이 이상한 놈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고마워서 미안해하는데 왜 그것 가지고 그리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고맙다 말하던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결국 나 자신의 행위마저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선의는 선의로 받아들일 때 가치가 있다. 지나친 사양이나 공손함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원래 나는 이기적인 놈이다. 나 자신만 안다. 나 자신을 위해 선의를 행하는데 그 선의를 모욕하고 있다. 본질은 그것일 터다.
어쩌면 선하다는 것은 가장 이기적인 행위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돌아보지 않는다. 선을 베풀려는 대상조차 때로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어떤 고통도 어려움도 그로 인한 자신의 만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선을 망설이게 되는 많은 이유들은 결국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상 상을 받을 수 없다 마음먹었어도 그것을 대신 읽어야 할 누군가를 위해 양보해야만 한다. 방송국의 입장을 생각하고, 동료배우와 스태프의 입장도 생각하고, 가족도 생각하고, 시청자와 팬들도 생각하고, 그래서 망설이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만다. 이기일까? 이타일까?
선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 그리하는 것인가. 그 경험이었을 것이다. 어떤 대단한 사상도 철학도 결국은 경험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진보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아닌 나 자신이 놓인 고단한 현실이다. 문득 연말연시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기에.
한 두어놈 되는 것 같다. 집 근처는 한 놈이다. 누군가 밥주는 것 가지고 뭐라 할까 조심스럽게 주느라 그리 많이는 주지 못한다. 올겨울을 잘 나야 할 텐데. 우리집 돼지놈은 뒤룩뒤룩 이불에서 퍼져잔다.
밤이 춥다. 바람이 차다. 적막이 고독하다. 아직은 세상이 슬픈 것을 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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