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이정진과 윤형빈, 그리고 병풍론...

까칠부 2010. 2. 10. 01:53

한국화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여백에서 나온다. 조선백자가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비운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치밀하고 정교하게 가득가득 채워 넣은 화려함도 좋기는 하다. 그러나 때로 채우지 않고 빈 채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림은 더 조화를 이루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 있다고 여러 색을 한꺼번에 쓰면 색이 부대낀다. 아름답지가 않다. 그것이 실제 있다고 여러 선을 한꺼번에 섞어 쓰면 선이 얽힌다. 때로 색을 줄이고 선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색을 정리하고 선을 줄일 때 조화가 이루어지고 훨씬 더 멋진 그림이 되기도 한다.

 

남자의 자격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다. 특히 이정진과 윤형빈을 보면서. 초반 그리 분량을 탐내고 웃음을 욕심내던 모습에서 오히려 모든 것을 비우고 병풍을 자처하는 지금의 모습에서.

 

지리산편에서 그렇게 이정진이 눈에 갔더랬다. 아니 처음에는 아니었다. 그런데 여초사이트에서 이정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뒤에서 이윤석을 지탱하며 올라가는 것이 그리 멋지다던가. 뜨거운 보이차며 삼각김밥이며 무거운데도 챙겨와서 형들과 나누는 장면이 든든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여겨 본 이정진은 완전 다큐멘터리였다. 그래도 힘이 남아 있는 한 모두가 예능을 찍고 있는데 홀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묵묵히. 굳이 카메라를 탐하지 않고. 웃음을 욕심내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오롲 자기 역할만을 다 하며.

 

지난회차에서도 그래서 윤형빈이 눈에 들어왔다. 이경규가,

 

"야! 와이퍼 가져와!"

 

아마 웃음을 욕심내고 하는 경우였다면 거기서 조금 받아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는 쪽이 재미도 더 있고 윤형빈이라고 하는 개인과 캐릭터도 더 돋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윤형빈은 그러지 않았다. 받아치기는 커녕 김태원에게 워셔액까지 넘겨주고는 나중에는 아예 OB팀의 것까지 하나 더 사오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절묘하고 중요한 장면이냐면, 사실 자기들은 아무것도 않고 후배들이 사온 것을 빼앗는 것, 고약하게 보일 수 있다. 더불어 그럼에도 주지 않고 이러쿵저러쿵했다면 윤형빈과 YB, 그리고 OB와의 사이에 어떤 앙금이나 갈등요소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형빈이 그냥 받아줌으로써 OB는 그저 철딱서니없는 큰형들로, YB는 그런 형들을 전혀 경쟁상대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마음쓰는 동생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남자의 자격만이 갖는 고유한 분위기다. 모두가 그런다. 훈훈하다고. 그 훈훈함은 악역이 없는데서 나온다. 이경규조차 남자의 자격에서는 무척 귀여운 모습으로 나온다. 김태원이 이정진을 보고 독설을 해도 독설로 들리지 않는 분위기 - 하긴 독설을 한다고 마주 독설로 받는 분위기가 아니다.

 

남자의 자격이 재미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설을 한다고 독설로 받는 멤버는 없다. 독설을 하면 그냥 독설을 하는대로 받아준다. 그런 장난 쯤이야... 장난을 치면 또 장난대로 받아준다. 장난이니까... 그래서 쓸데없는 부대낌이나 갈등 없이 관계는 예능 이상의 어떤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정진과 윤형빈.

 

윤형빈은 말 그대로 막내로서 이것저것 오만 것을 감당하는 역할이다. 때로 무시당하기도 하고, 때로 디스당하기도 하고, 때로 협박도 당한다. 심부름도 이것저것 혼자 다 도맡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스르는 법이 없다. 병풍이라 비난하는 목소리마저 있을 정도로 거스르지 않고 묵묵히 받아낸다. 만일 윤형빈이 아닌 다른 누군가 - 웃음과 분량을 욕심내서 자기를 주장하려 드는 멤버가 있었어도 남자의 자격이 지금의 분위기였을까.

 

이정진은 윤형빈과는 다른 역할이다. 윤형빈이 당하는 역할이라면 이정진은 말 그대로 여백이다. 아니 병풍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비덩이라는 말 그대로 그저 얼굴만 잘생겼다. 그리고 그 얼굴만 보인다. 그런데 그 얼굴이 보이는 곳이 그렇게 필요한 것이다. 지리산편에서도 그랬고, 그제 자동차편에서도 그랬다. 김성민이 요란스레 이것저것 잘하는 캐릭터라면 이정진은 조용히 이것저것 잘하는 캐릭터랄까. 김성민은 나대고 대신 이정진은 뒤에 숨어 뒷받침한다. 가끔은 타이밍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멘트로 웃음도 주고.

 

그것은 자칫 다른 멤버들의 예능으로 인해 한껏 들뜰 수 있는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물론 김성민도 그같은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봉창이라는 캐릭터는 이때 거슬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기에, 그리고 두드러지지 않기에, 마치 여백처럼 한 구석에서 자기 역할에 묵묵히 충실한 모습이란 전혀 의식하지 않더라도 프로그램에 단단한 힘을 싣는다.

 

마라톤편에서도 그는 그리 웃기지 않으면서도 단단했더랬다. 감동은 없었는데 조용하게 젖어드는 게 있었다. 마라톤 그 자체처럼 무릎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는 장면은, 비록 이윤석과 이경규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가 왜 남자의 자격에서 반드시 필요한 멤버인가를 보여준다.

 

물론 모두가 웃길 수 있으면 좋다. 그것도 훌륭하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주연만 나오는 법은 없다. 조연도 있고 단역도 있다. 오히려 조연이 잘해야 드라마가 살기도 한다. 분명 중요한 것은 주연이겠지만 주연에 비해 떨어지는 비중과 역할에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할 때 드라마는 재미있다.

 

모든 축구선수가 골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모든 타자가 홈런을 칠 필요가 있을까. 투수 가운데도 오른손 정통파가 있는가 하면 왼손 기교파도 필요한 것이다. 언더스로우도 필요하고, 사이드암도 필요하고, 또 지는 경기에서 패전처리를 하는 역할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 것이 어루어져야 좋은 팀이 된다.

 

남자의 자격이 물흐르듯이 흐르더라는 것, 그것이 지금 와 더욱 물이 올라 언제부터 상황이고 언제부터 상황이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럽게 장면장면이, 그리고 말과 말이, 행동과 행동이 이어지더라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이경규가 억지를 부려도 묵묵히 받아주는 이윤석, 그리고 약간은 배려를 담아 조금은 짓궂게 장난도 치고 하는 김성민, 자기 역할에 더 충실한 이정진과 그저 착한 윤형빈. 윤형빈이 남자의 자격으로 얻은 것 가운데 하나 - 이제 어지간히 왕비호로 문제가 되어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남자의 자격에서의 이미지가 너무 좋아서.

 

웨이크보드편에서 노부부를 연기하며 김성민과 이정진을 걱정하던 이경규와 김태원의 모습이란 그래서 김태원이 그래도 의욕을 가지고 지리산을 오를 때 그것을 흐뭇하게 보던 김성민의 표정과 오버랩된다. OB팀을 걱정하면서도 짓궂은 웃음을 짓곤 하는 YB의 모습도 그렇고. 더 웃음을 탐냈다면 일부러 사건도 만들고 했을 테지만 굳이 그런 것 없이 이제는 그같은 관계 자체를 즐기게 된 것이라.

 

병풍론이라 하지만 결국 모든 멤버에 대한 칭찬이 되었다. 당연하다. 관계란 그렇게 이리저리 얽히고 섥혀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니까. 이정진의 진지함이 병풍이 되고 또 남자의 자격에서 의미를 갖는 것도 그런 것들에 의지하고, 동조하며, 때로는 그것을 소재로 삼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윤형빈의 존재감 없이 착하고 성실하기만 한 모습이 병풍이 되고 또 의미를 갖는 것도 그것을 이용하고 자극하는 형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풍은 중요하다. 모두가 어수선한 가운데 홀로 조용하기에. 모두가 웃기려 하는 가운데 홀로 웃기지 않기에. 모두가 욕심내고 급한 가운데 홀로 욕심내지 않고 느긋하기에. 그러면서 넘치는 의지들이 조화를 이루어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느 한 곳 부대끼거나 튀는 법 없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그 자리에 없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는 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있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병풍이라고 다 같은 병풍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남자의 자격에 있어서는. 모두가 주연일 필요는 없으니까.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는 드라마, 조연 가운데서도 비중있는 조연에서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조연에서 하다못해 단역까지 자기 역할에 맞게 충실할 수 있는 드라마, 가장 훌륭한 리얼버라이어티는 드라마다. 단지 세부적인 각본이 없을 뿐인. 나는 그래서 남자의 자격을 좋아하듯 이정진과 윤형빈을 좋아한다. 그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