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마음이 짠했다...

까칠부 2010. 2. 22. 07:06

예전 노가다 뛸 때 그런 경우 많았다. 평생 험한 일이라고는 해 보지 않은 가장이 앙상한 하얀 몸을 드러내고 비틀거리며 일하는 모습들이었다. 때마침 IMF를 앞두고, 또 IMF를 당하고 난 뒤라.

 

힘이 없으면 요령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평생 책상물림만 해왔으니 뭘 아나?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서성이고 있으려면 어디선가 야단이 떨어졌다.

 

"뭐하는 거야?"

"그러려면 뭐하러 나왔어? 집에나 있지!"

 

그러나 다들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아마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며칠은 끙끙거리고 앓을 것이다. 그리고 또 아직 채 풀리지 않은 몸으로 다음 일자리를 찾아 힘겹게 나오겠지. 가족을 위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또 아버지이고 남편들이기에 그런 사정을 알아 더 다그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배우라고. 조금이라도 빨리 일에 익숙해지라고. 힘에 부쳐 어쩔 줄 몰라하면 또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다시는 나오지 마쇼!"

 

아마 조금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런 데 나오지 말고 자기 자리 찾으라. 그러나 그게 쉽나. 다시 말하지만 IMF였다는 것이다. 막노동이라도 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어 번번히 허탕쳐야 했던. 핏덩이 자식을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고아원에 내맡기고 생이별을 감수해야 했었던. 그나마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으면 그게 어딘가.

 

처음 취지는 요즘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하필 이경규와 이윤석이 들어가는 바람에 완전 꼬여버렸다.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느라 비틀거리는 이경규의 모습에서, 도무지 힘에 부쳐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윤석의 모습에서, 그때 앙상한 하얀 알몸을 드러낸 채 볕 아래 땀을 흘리던 아버지이고 남편이던 이들이 떠올라 버린 것이다. 가슴이 짠한게...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년실업 청년실업 하지만 더 심각한 게 장년실업이다. 결혼도 하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고,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자기는 물론 가족이 굶게 된다. 굶을 땐 굶더라도 최소한 자식들 가르치기는 해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또 익숙지 않은 일자리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그래서 또 실직한 가장들의 아르바이트가 늘고 있다지 않은가. 일본식 용어로 프리터던가?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 가장들이 늘고 있다는 거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파트타임 일자리가 늘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래서 김성민의 생쇼에 한참 웃다가도 이내 웃음을 멈추고 먹먹한 가슴을 침묵으로 달래야 했다. 아침부터 이런 거나 보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저 무거운 짐보다 더 무거운 가족을 등에 지고 그래도 묵묵히 힘들어도 걸어가야 하는 많은 가장들 앞에. 아, 남자만이 아니다.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공사장 가면 그렇게 아주머니들이 많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던가. 모든 가족을 책임지는 소중한 사람들 앞에.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예능이었다. 웃음이 나와서는 안 되는 예능이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예능이 있다니. 여전히 지난주 품었던 의혹은 남아 있지만 그래서 잠시 그런 의심따위 지워버리기로 했다. 제작진의 의도한 바였든지 아니었든지 지금도 이경규처럼, 혹은 이윤석처럼 익숙지 않은 일을 찾아 채 회복되지 않음 몸으로 출근하고 있을 많은 이들을 위해. 다시 한 번 그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와 위로의 말을 보내며, 남자의 자격이 작으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싶다.

 

 

김태원의 경우는 혼자 일하러 간 탓에 딱 "체험 삶의 현장" 분위기였다. 그냥 교양이구나. 그냥 예능이구나. 딱 그만한 재미를 주었었다. 열심히 일도 하면서, 수다도 떨면서, 나올 수 있는 실수도 저지르면서. 확실히 밴드 리더는 리더라는게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상대하다 보니 상황적응력이 장난이 아니다. 김태원만 혼자서 일을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김국진과 윤형빈은 마지막 수상한 삼형제 출연자들과 만나면서 역시 예능 분위기를 냈다. 게스트를 상대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그냥 모셔다만 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프로그램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연예인과 만났어도 그 대화는 철저히 프로그램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또 예능감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희진과으 적절한 상황극도 그래서 재미있었다.

 

김성민은 어딜가나 김성민. 이래서 김성민이다. 시멘트포대를 드는 한 가지로 이렇게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다니. 적절한 과장된 리액션과 애드립은 역시 배우구나 하는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일만 열심히 해도 예능이 된다. 이정진과는 다른 배우로서의 김성민의 장점이다.

 

그리고 아예 대놓고 밀기 시작한 이정진. 이번에도 이윤석과 함께 일하며 철저히 이윤석을 돕고 보호하는 역할로서 자기를 드러냈다. 김성민처럼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착하고 성실한 캐릭터로서. 비덩답게 사람좋은 웃음이 어울리는 좋은 남자로서. 오늘도 멋졌다.

 

다만 문제라면 하필 힘든 아파트공사장에 이제 50대에 접어든 이경규를 보내고, 이정진조차 힘들어하는 경사면녹화사업장에 국민약골 이윤석을 보내고, 도대체 제작진은 무슨 생각인 것일까? 하프마라톤 때는 이윤석과 이경규의 의지가 워낙 대단해 그러려니 넘어갔지만 과연 그러다 한 번 사고가 나야 그때나 정신을 차리려는 것일까? 사람 몸 상태를 보면 모르나? 앞서 긴 글을 쓴 이유도 그것이다. 그렇게 앙상한 하얀 팔다리로 일 나온 사람들 한 번 일 나오고 나면 또 며칠을 끙끙 앓는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닌 만큼 다치기도 쉽다. 아무리 리얼버라이어티라지만 - 예능이라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연예인은 소모품이 아니다. 프로그램을 위해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다. 물론 그래서 재미도 있었지만 조금 더 출연자들을 배려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윤석과 이경규를 보면서 조마조마했던 것이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잡생각도 들고. 예능은 곡예가 아니다. 도박도 아니고 모험도 아니다.

 

의미도 있었다.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한 가지가. 전혀 출연자를 배려하지 않는 일의 배정이 너무 아쉬웠다. 재미있자는 예능에서 마음이 불편해서야 어디에 쓰겠는가.

 

아무튼 그럼에도 기분이 좋은 것은 바로 다음주 때문이다. 드디어 하는구나. 남자의 자격 밴드. 어쩔까나? MBC가 파업을 해도 이건 보고 싶은데. 만일 파업하게 되면 꽤 괴로울 것 같다. 파업기간동안 참는 것이 뭐 일이겠냐만. 몰래 보고 그냥 티만 내지 말까?

 

 

그제는 새벽에 정전되는 바람에 보일러 꺼져. 또 오전에는 보일러 터지는 바람에 그거 고치느라 한 세월. 추워 덜덜 떠느라 잠을 설쳐서 한 숨 자고 나니 남자의 자격은 끝나고. 다시보기로 보면서 참 요즘 남자의 자격 보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벌써 본방 못 본 것이 몇 번인가. 하여튼.

 

지금도 덕분에 후유증이 남아 몸이 장난아니게 피곤하다. 잠도 안와서 새벽부터 그래서 이러고 있는 중. 아마 2월의 운세를 한 번 봐야 할 듯.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