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들국화 -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까칠부 2010. 2. 23.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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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아 올때까지 - 들국화

기나긴 하루 지나고 대지위엔 어둠이
오늘이 끝남을 말해주는데
오늘의 공허를 메우지 못해 또 내일로 미뤄야겠네
꿈속의 내 영혼 쉬어갈 그사랑 찾아서
아침이 밝아올때까지 내 몸 쉬어가며
사랑하는 여인을 꿈속에 만날까
육신의 피로함 풀리겠지만 내 영혼의 고난 메워질까
꿈속의 내 영혼 쉬어갈 그사랑 찾아서
아침이 밝아올때까지 내 몸 쉬어가며
사랑하는 여인을 꿈속에 만날까

가사 출처 : Daum뮤직

 

 

하루를 마치려 어둠이 내리면 함께 항상 밀려드는 것이 후회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했나. 나는 왜 이런 것들을 하지 못했나. 나는 왜 그런 것들을 해야 했을까. 삶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어둠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려 하면 후회는 깊고 고독도 깊다. 때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러나 후회를 후회로 끝내고 마는 것은 미련에 불과하다. 후회를 반성으로, 그리고 내일을 위한 꿈으로, 의지로.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후회 끝에 그래도 내일은 더 나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끝없이 절망하고 좌절하면서도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 후회하고 후회할 일들을 만들면서도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은 또한 그럴 수 있는 힘을 회복하기 위한 소중한 시간이다.

 

들국화에서 기타를 치던 조덕환이 쓴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그런 삶에 대한 낙천적인 기대를 그리고 있다. 깊은 후회와 깊은 절망과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포효하는 듯한, 그리고 절규하는 듯한 전인권의 쇳소리는 그렇게 젊음의 고뇌처럼 영혼의 상처를 헤집는다. 그래, 괜찮아. 그래, 괜찮아. 젊은 날의 방황과 공허는 그렇게 또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된다.

 

 

원래 언더그라운드란 미디어의 힘을 빌어 자신과 음악을 알리는 주류 음악인들에 비해, 미디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 - 혹은 못하고 - 공연등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며 소통하는 비주류음악인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70년대 미군무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클럽무대와 도심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다운타운 문화를 통해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을 텐데, 아마 80년대 조동진씨가 대중에 알려지면서 그와 함께 언더그라운드라는 말도 널리 쓰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클럽무대는 연주인의 무대였다. 그들은 프로연주자였고 그들의 고용주와 손님이 원하는 음악을 얼마나 훌륭히 연주해낼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미군을 대상으로 한 클럽에서 그들은 미국 본토의 음악인들과 그들의 음악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반면 후자는 시대의 젊은이들과 교감을 나누던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였다. 약간은 아마추어리즘이 남아 보다 엄밀한 연주력보다는 시대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자신들이 만든 음악에 실어 들려주기를 원했다.

 

물론 모두가 훌륭한 음악인이고 연주인들이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프로페셔널로서의 엄밀함이었을 것이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열정이었을 것이다. 서로에게 있는 것이되 또한 서로에게 결여된 것이었다. 특히 그런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나 있던 것이 밴드음악이었다. 단지 연주를 할 뿐이라. 단지 노래를 부를 뿐이라. 혹은 그저 자기 이야기만 할 뿐이라. 더구나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란 주류음악이 미디어에 종속되어 있듯 그들이 서는 무대의 주인과 손님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손님을 위해 불러야 했고, 업소 주인을 위해 불러야 했다. 심지어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온갖 잡일까지 마다하지 말아야 했다.

 

그런 때 그들이 나타났다. 처음 만남은 역시 밤무대에서 얼굴을 익힌 함춘호의 소개로 전인권과 허성욱, 조덕환이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들 밴드의 드럼을 맡은 것이 나중 백두산에서 드럼을 치게 되는 한춘근. 전인권은 삼청동 공원 길거리에서 통기타 하나로 노래를 시작한, 여러 업소를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던 통기타 가수였고, 허성욱은 아마 예대를 다니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조덕환은 업소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을 테고.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만들어진 밴드는 강원도의 디스코텍에서 연주를 하게 되어 있었지만 허성욱이 중간에 빠지면서 흐지부지 해체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때의 인연으로 전인권은 다시 돌아온 허성욱과 동방의 빛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며 자신들만의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이는 이후 들국화가 해체되고서도 전인권과 허성욱이 "추억들국화"라는 사실상 들국화 2집이라 일컬어지는 앨범을 내는데 한 몫 하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을 하고자 하는 열정은 음악카페 모노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의 아들이자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던 최성원을 만나면서 점차 구체화된다. 나중 들국화가 해체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인 불화설의 주인공이기는 했지만 당시 최성원의 음악은 전인권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아마 음악카페 "뮤직라보"에서 연주한 "매일 그대와"가 그들이 연주한 첫 자작곡이었을 것이다. 아니 전인권의 경우는 이미 그 전 강인원 등과 함께 작업한 따로 또같이에서 "맴도는 얼굴"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팀을 만들고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은 점차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고 전인권이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예전 함께 밴드를 만들었던 조덕환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최성원이 악보를 들고 찾아와 전인권으로 하여금 자신이 참여하고 있던 옴니버스 앨범 "우리 음악 전시회"에서 노래할 것을 권했다. 그 노래가 들국화 1집의 대표적인 노래,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다.

 

결과는 자못 성공적이었다. 크게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평가는 좋았다. 전인권을 비롯,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의 네 사람은 이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들의 음악을 하고자 팀을 만들었다. 84년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라는 무당의 공연에 게스트로 나서면서 그 이름을 알린 밴드의 이름은 "들국화". 이후 한국 대중음악사에 전설이 될 이름이었다.

 

85년 1월 파랑새 소극장에서 연 최초의 단독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이미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기에 백 여 성 규모의 소극장에는 25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들었고, 무려 열흘이나 연장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85년 9월 더욱 자신감을 얻은 들국화의 멤버들은 그동안의 라이브를 통해 알게 된 밴드 "믿음 소망 사랑"의 최구희와 주찬권을 세션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역사적인 첫앨범 들국화 1집을 내놓게 되었다.

 

그들의 첫앨범은 앨범 자체로 혁명이었다. 이병우가 쓴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제외하고 전곡을 멤버들이 직접 작사작곡하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사람에게 편중되는 일 없이 고루 참가하고 있었다. 조덕환이 "세계로 가는 기차"와 "축복합니다""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썼고, 최성원이 "그것만이 내 세상""더 이상 내게""사랑일 뿐이야""매일 그대와"를, 전인권이 "행진"을 썼다. 부르기도 주로 전인권이 불렀지만 "세계로 가는 기차"는 조덕환이, "매일 그대와"는 최성원이, "사랑일 뿐이야"는 최성원과 전인권이 함께 불렀다. 누구 하나 소외되는 법 없이 모두가 참가한 앨범. 단지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하는 것만이 아닌, 누구 하나에 의해 주도되는 것도 아닌, 실제 무대 위에 서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최초의 앨범이었다. 그것은 한국 언더그라운드는 물론 한국 대중음악계가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숙제를 한 번에 그것도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풀어낸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 또한 주목할 만했다. 당시만 해도 밴드란 클럽무대에 서는 것이 정석이었다. 스쿨밴드에서 시작한 송골매나 벗님들도 밤무대에 서며 생계를 해결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호히 자신들의 무대에서 자신들의 관객을 위해 자신들의 음악을 연주할 것을 선택했다. 무대 위에서 대중과 직접 만나며 소통한다. 락의 정신이자 언더그라운드의 근본을 그들을 실천한 것이었다. 어쩌면 전인권이나 허성욱이나 조덕환이나 최성원이나 모두가 업소라는 환경에 익숙해 있었기에 자신들의 음악이 있을 곳은 더욱 업소가 아닌 대중과 만나는 공연장임을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들국화의 그같은 행보는 당연히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부활이 해체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밤무대에 서고자 했던 이승철의 요구를 김태원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고, 시나위 역시 광고출연이나 방송출연에 대해서까지 신대철이 완고하게 거절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음악이 있을 곳은 무대 뿐이라. 오로지 무대에서 연주로만, 자신들의 음악으로만 대중과 만날 뿐이라.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완성이자 90년대 인디문화로 이어지는 어떠한 한국 대중음악의 정신적 뿌리가 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다.

 

들국화가 남긴 유산도 대단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일컬어지는 들국화 1집은 많은 음악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넘은 대폭발의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그들의 영향 아래 나타난 80년대 중후반 락씬의 스타음악인들인 이승철, 임재범, 서태지, 손무현, 김종서 등이 주류음악계로 대거 편입되면서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를 열었고, 그들이 만들어낸 언더그라운드의 전통은 말했듯 지금의 인디문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국 대중음악의 80년대 이후를 정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들국화 1집이 괜히 역대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들국화는 음악적으로나 생활적으로 매우 불행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원래 공연이라는 게 돈이 되지 않는다. 콘서트라는 게 지금도 많은 밴드들이 빚을 져가며 콘서트를 한다. 콘서트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콘서트를 하기 위해 돈을 버는 형국이다. 하물며 아직 콘서트문화 자체가 정착되어 있지 않던 당시에는 더 심했다. 전국투어를 하면서 매번 만원사례를 이뤘지만 정작 들국화 멤버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60만장의 앨범이 팔려나가고, 공연마다 관중이 꽉꽉 들어찼어도 그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더구나 1집의 성공으로 음악적인 욕심이 생긴 최성원이 아무래도 연주력이 아쉬웠던 조덕환을 탈퇴시키면서 전인권과 최성원 사이의 감정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들국화의 두 기둥이라 할 두 주축멤버의 갈등은 당연히 앨범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나온 들국화 2집이 참담한 실패를 거두면서 들국화는 더 이상 유지될 동력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들국화가 1집 멤버 그대로 4집까지만 낼 수 있었다면. 당시 들국화의 파괴력으로 4집까지만 이어갈 수 있었다면. 한국 락음악사상 들국화만큼 독창적이고 완성도 있는 음악을 하면서 대중적으로도 관심을 받았던 밴드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4집까지만 계속 이어가 주었다면 한국 대중음악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어 터진 대마초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게 균열이 일고 있던 들국화에 치명타를 가했다. 서로 추구하는 음악까지 달랐던 멤버들은 그로써 들국화라는 이름을 역사에 묻고 뿔뿔이 제 갈 길을 가고 만 것이었다.

 

물론 이후로도 주로 전인권을 중심으로 들국화라는 이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추억 들국화, 들국화 3집과 4집,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인정하는 들국화는 2집조차도 아닌 1집 하나다. 오로지 들국화 1집만이 들국화였다. 전인권과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의 네 사람이 완벽한 화학적 결합으로 최고의 결과물을 내었던 이 단 한 장의 앨범만이. 돌이켜 볼 수록 아쉽고 안타까운 장면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들국화가 해체되고서도 여전히 전인권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성원도 끊임없이 자기음악을 만들고 내놓고 있었다. 주찬권, 최구희 모두 자기 영역에서 들국화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사고로 사망한 허성욱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래서 허성욱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들국화가 뭉치기도 했었다. 조덕환은 미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하고.

 

아무튼 들국화가 남긴 발자취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생명을 불살하 내놓은 듯한 한 장의 앨범이었다. 마치 순교자처럼 자신을 불살라 내놓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보물이었다. 모두가 그것을 씨앗삼고, 모두가 그것을 거름삼고, 그로써 70년대가 끝나고 80년대가, 그리고 90년대가 열렸으니. 아마 지금도 그 영향 아래 있다 해도 좋지 않을까. 전설이란 어쩌면 그 끝이 비극이기에 전설인지도 모르겠다.

 

들국화가 해체되고서도 벌써 24년 여, 한 아이가 자라 어느새 한 아이의 부모가 되기에도 충분하고 남는 시간이다. 어느새 기억마저 흐릿한.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은. 그것은 꿈이었던가? 전인권의 포효는, 들국화가 세상에 내놓은 그 외침들은 단지 꿈이었던 것일까? 기억하는 이조차 이제는 희미한. 그러나 음악은 남아 그것을 전한다. 여전히 카랑한 전인권의 목소리를 통해. 같은 시대를 꿈꾸던 이들의 생생한 연주를 통해. 에디슨이 이리 고마울 줄은. 시간을 이렇게 잡아 가둘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고민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당연하고, 과연 그 다음은 무엇으로 해야겠는가. "행진"도 당연히 좋았고, "세계로 가는 기차"도 매력적이었다. "사랑일 뿐이야""매일 그대와""더 이상 내게" 등 무엇 하나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좋은 노래들이다. 당시도 앨범의 전곡이 라디오를 통해 대중에 알려지고 있기도 했다. 과연 어떤 노래가 좋은가. 그러나 마침 밤이라. 지친 마음은 이 노래를 고르도록 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지치고 외로울 때, 가끔은 절망하고 가끔은 좌절할 때,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내일이 시작되리라. 잠시 주저앉아 눈물도 흘리고 절규도 하고 아파도 하라. 그러나 어둠이 주는 안식은 내일에는 다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리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나온 명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별조차 없이 어두운 새벽에 곧 떠오를 태양을 기대하는 것일 게다. 두렵기 그지없는 어둠 속에서도 내일을 기대하며 편안한 잠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상처입은 맹수의 외침을 닮은 전인권의 목소리는 그래서 힘겨운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같다. 괜찮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내일이면 괜찮아지리라고. 희망이란. 꿈이란.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을 믿어보고 싶은 터라. 나 자신을 위한 위로며 선물이다. 이 노래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