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남자의 자격 아마추어밴드편을 다시 돌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과연 내 생각이 옳았는가.
아무도 연습을 해오지 않았었다. 이윤석만 개인적으로 학원에 다니며 드럼을 연습해 왔을 뿐, 김성민은 가사조차 외우지 않았고, 이정진은 아예 연습을 하지 않았으며, 김국진은 여전히 기본적인 운지마저 되어 있지 않았다. 윤형빈은 미레도레마저 틀리고 있었고. 그런데도 여전히 웃고 있는 김태원을 보며 이것도 김태원의 예상범위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예능을 하려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예능이면 오히려 더 화를 내야 하는 것이었다. 김태원이 화를 냄으로써 오히려 상황은 더 재미있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겠는가? 김태원이 남 공격하는것을 꺼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 적절한 디스는 예능적인 활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은 것은?
그래서 생각했다. 어쩌면 김태원은 뼛속까지 음악인이 아니었겠는가. 그는 단지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한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음악이라는 게 단순히 노래 잘하고 연주 잘하는 것만이 음악은 아니다. 김태원도 프로그램 내내 강조해 말하고 있었다. 김국진더러 앞으로 나서야 한다며, 이정진더러도 앞으로 나서야 한다 하면서, 이경규의 오버액션을 칭찬하면서, 신너를 줄테니 기타에 불을 붙이라?
"지미 핸드릭스처럼..."
보이는 것도 음악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도 음악의 한 부분일 수 있는 것이다. 멋진 퍼포먼스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 위에서의 액션도. 엑스재팬에게 있어 화려한 분장과 무대에서의 시각적인 효과 역시 그들의 음악을 이루는 한 부분인 것처럼.
"딩가딩가... 그럴 거면 음반으로 들으면 되지."
특히 공연은 단지 귀로 듣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귀로 듣는 것 말고도 눈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귀로 듣는 것이 안 된다면 눈으로 보여주기라도 해야 한다.
김태원은 데뷔앨범을 내면서 방송에 불리할 것 같다는 이유로 스스로 자작곡인 "비와 당신의 이야기" 대신 양홍섭의 "희야"를 락으로 편곡해 타이틀곡으로 실었을 정도로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다. 대중이 들어주지 않으면 대중음악이란 의미가 없다. 하긴 신대철도 그 소리 하더만. 자신의 음악을 자신의 음악과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콘서트에서도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아닌 철저히 관객이 듣고 싶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즉 그에게 음악이란 어떤 엄밀함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바로 앞에 있는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 굳이 연주가 아니어도 좋고, 노래가 아니어도 좋다.
한 마디로 남자의 자격 밴드가 아무리 형편없는 연주를 해도 이미 그런 정도는 김태원에게 있어 양해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 음악이 아닌 비주얼로 나가자고 했을 때. 음악으로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으니 비주얼 위주로 팀을 구성하자고 했을 때. 말하자면 이 또한 김태원식 비주얼밴드인 셈이다. 음악보다는 음악 외적인 요소로서 승부를 보자는. 밴드의 리더이자 프로듀서로서의 김태원의 선택인 셈이다.
음악도 따라서 그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김태원식 발라드이기는 하지만 멤버들의 수준에 맞게 최대한 쉽게. 어차피 실력으로 기대할 것이 없으니 더 열심히 연습해서 도전하도록 하기보다는 지금의 수준에서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게 더 무서운 점이겠지만.
말하자면 남자의 자격에서 보여준 김태원의 모습이란 그의 음악인으로서의 한결같은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능을 하자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밴드의 리더이자 프로듀서로서 그의 정체성이며 자존심이었다. 허투루 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남자의 자격 밴드가 추구하는 방향이야 말로 김태원이 음악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가 굳이 화를 내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자격 밴드에 필요한 것은 밴드로서의 어떤 음악적 완성도가 아니라 남자의 자격만이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일 테니. 음악이 아닌 음악 외적인 것들.
"이제부터는 안무나 동작을 만들어가야 할 때야. 맞고 틀리고 따지면 아무것도 못해."
그러나 나 역시 음악이라 하면 귀로 듣는 것을 먼저 떠올리고 마는 거라. 그래서 나는 그것을 예능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능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태원이라는 음악인이 실제 남자의 자격이라는 밴드를 음악인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들어 가는 것일수도.
그래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은 그리 무섭지 않다. 그저 때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은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러나 일관된 고집으로 다양하게 바뀔 수 있는 사람은 무섭다.
음악인이다. 락밴드의 리더다. 음악적 욕심이 있을 것이다. 더 잘하고, 더 훌륭하게 연주해 내고, 아마 멤버들더러 사적인 시간을 내서 열심히 연습하도록 했다면 9개월만에 어지간한 밴드 수준은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기대마저도 깡그리 배제한 채 현재의 모습에 충실하게 그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고 그 가능성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음악적 고집과는 다른 방향일 수도 있게.
미레도레란 그래서 어쩌면 김태원의 음악에 대한 철학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더 멋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더 훌륭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난이도 높게 기술적으로 탁월하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리더로서 자신을 그에 충실히 부합하고.
아마 자신이 원래 쓰던 스타일로 곡을 썼다면 "사랑해서 사랑해서"는 편곡에 한 달 씩이나 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에서도 잠시 몇 분만에 곡을 써내고 있었고, 이번 월드컵 응원가도 열흘만에 작곡에서 녹음까지 끝냈다고 하니. 남자의 자격에게는 남자의 자격에 맞게.
그리고 나는 그러한 김태원의 마법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었다. 저 형편없는 수준의 - 밴드로서의 자세조차 되어 있지 않은 남자의 자격 밴드에 대해서조차 감탄하고 말았으니.
리더라는 것일까? 리더란 자신이 빛나서라기보다는 주위를 빛나게 함으로써 자신이 빛나는 존재다. 그가 단지 자신의 음악적인 엄밀함만을 추구했다면 남자의 자격 밴드가 저리 주목받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할마에는 단지 그저그런 락밴드 리더로 끝나고 말았을 테지.
새삼 음악인 김태원에게 감탄하며... 또 새삼 이런 것이 음악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또 그래서 몇 번을 보고 또 다시 봐도 항상 새로운 남자의 자격만의 매력에... 예능이 아닌 음악이라는 본질에 충실했기에 예능 이상의 예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진심이. 그러한 진심에서 우러난 모습들이.
그래도 설마 5월에는 제대로 연습해서 나오겠지? 지금까지 식이면 문제가 있다. 단지 틀리지 않는 수준이면. 그것도 그렇게까지 자신들을 위해 쉽게 써준 곡을 가지고서. 아니기를.
개인적으로 그래서 생각한 건데 김태원에게 밴드 컨셉 아이돌 프로듀스를 맡겨보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카라밴드 추천. 그런 가운데서도 꽤 재미있는 밴드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다른 음악인이라면 몰라도 김태원이라면 꽤나 재미있게 밴드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인으로서의, 그리고 자연인으로서의 김태원의 재발견이었다. 원래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가 더욱 좋아졌다. 김태원이라는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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