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돼지고기 간장수육

까칠부 2020. 5. 13. 14:14

우연히 유튜브에서 동파육 만드는 걸 봤다. 일단 삶고, 튀기고, 졸인다. 근데 귀찮다. 언제 저걸 다 하냐?

 

그러다가 과정을 조금 줄이면 장조림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빼고 고기만 간장에 향신료와 함께 졸여도 맛있지 않을까? 그리고 기왕에 장조림 만들 것이면 내 입맛에 맞게 술안주로 바로 먹을 수 있도록 간장을 좀 줄여보자. 원래 위대한 발견은 우연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그래도 시작이 동파육이었으니 고기를 한 번 작은 냄비에 삶아준다. 그냥 삶으면 고기맛이 다 빠져나올 것 같아서 간장으로 어느 정도 농도를 맞춰 준 뒤 삶아서 고기만 건져내 씻는다. 씻어내는 이유는 고기에 붙은 잡스런 것들을 닦아내서 스텐레스 냄비에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원래 한 번 삶아낸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었다. 잡스런 맛과 냄새를 빼서 더 깔끔하게 조림을 완성한다.

 

조림국물은 간장과 계피, 생강, 청양고추, 바나나, 마늘로 만든다. 간장은 반찬이 아닌 술안주라 약간 모자른 정도로만, 나머지는 적당량으로, 바나나가 들어간 이유는 단 맛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설탕을 쓰기 싫다는 이유에서였었다. 뭘로 할까 하다가 마침 변색한 바나나를 무더기로 싸게 팔길래 들고와서 그냥 고추와 함께 통으로 넣었다. 한참 끓고 있으려니 수정과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게 진짜 국물도 딱 맵고 짠 수정과였다. 간장과 청양고추만 빼면 이 레시피로 수정과 만들어도 괜찮을 듯. 그리고 이 국물에 삶아서 씻어 놓은 돼지고기를 1시간 정도 낮은 온도로 푸우우우욱 익혀준다.

 

잘 삶아진 돼지고기는 비계에 칼 들어가는 느낌만으로 바로 알 수 있다. 젤리같다. 쫀득쫀득하고 몽글몽글하다. 비리고 느끼한 맛 하나 없이 그냥 지방의 단 맛과 함께 입안에서 바로 녹는다. 여기서 한 덩이 건져내고 남은 한 덩이를 30분 정도 더 졸여주니 그야말로 방송에서 보던 것처럼 젓가락질만으로 비계까지 주욱 결대로 찢겨지는 정도가 된다. 다만 아쉽다면 간장을 너무 적게 넣은 탓에 장조림보다는 수육에 더 가까워졌다는 것. 그래서 제목도 간장수육이다.

 

나 역시 그동안 수육을 만들 때는 주로 된장을 사용해 왔었다. 사실 된장과 마늘만 있으면 다른 재료는 필요없다 할 정도로 제법 맛있는 수육을 만들 수 있었다. 냄새도 없고 간간하게 된장의 맛과 향도 배어서 밥반찬으로나 술안주로나 그 이상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간장으로 실패한 장조림을 만들고 나니 그 맛과 향이 된장수육 그 이상이다. 더 깔끔하고 더 담백하다. 계피와 생강의 향도 더 살아난다. 그냥도 맛있는데 김치도 사실 향신료 덩어리라 또 맛과 향이 서로 누르거나 덮지 않고 잘 어울린다. 다행히 얼마전 배송된 갓담근 김치가 있었던 터라.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인지.

 

국물은 버리기 아까워서 닭가슴살 삶으려고 따로 남겨 두었다. 확실히 매콤한 수정과 냄새를 풍기는 것이 그냥 들고 마셨으면 싶은 충동마저 느껴진다. 조만간 이 레시피 응용해서 수정과도 만들어 봐야지. 돈은 사먹는 것보다 더 들었다. 돼지고기 빼고 다른 재료만도 거의 1만원 넘게 들었으니. 물론 대부분 아직 많이 남아서 몇 번 더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앞으로 술안주는 이렇게 향신료만 바꿔서 장조림 아닌 수육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고 바로 팔각과 정향, 시나몬도 주문했다. 더불어 통후추까지. 조금 너무 거창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조리법도 아니다. 내가 수육을 좋아하는 이유. 재료 준비해서 냄비에 넣고 나면 다 익을 때까지 놀고 있으면 된다. 겸사겸사 수정과도 만들어 먹고. 

 

시작은 동파육에서, 장조림이 되었다가 끝내는 수육. 게으름에는 끝이 없다. 결과가 좋으니 좋다.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