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생고기구이와 문명의 발전, 동파육과 삼겹살의 차이

까칠부 2020. 6. 6. 17:42

그러고보니 좋은 고기는 아무 양념 없이 그냥 굽기만 해도 맛있다. 아니 오히려 양념하는 쪽이 고기의 맛을 해친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그래서 정육점에서도 신선한 고기는 그냥 팔지만 시간이 지나 맛이 떨어지는 고기는 따로 양념해서 파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깃집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양념한 고기보다 그냥 굽는 생고기가 맛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전통의 요리법들을 보면 그리 어렵고 복잡하기만 한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고기구이요리인 설야멱적만 해도 굳이 굽기 전에 일부러 칼등으로 쳐서 고기를 다져야 하고, 구우면서도 몇 번이나 찬 물에 식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동파육은 더 심하다. 일단 한 번 삶고, 다시 튀기고, 마지막으로 몇 시간이나 쪄야 한다. 물론 그러면 젓가락만으로도 찢길 정도로 고기가 연해지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대부분 고기들은 이미 충분히 연하다. 당장 흔히 먹는 보쌈의 수육만 하더라도 훨씬 적은 시간만 단순하게 삶았을 뿐이지만 충분히 입에서 녹을 만큼 연한 육질을 보여준다.

 

아마 여기에 답이 있을 것이다. 속담 가운데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 평소 먹어보지 않았다면 있어도 먹기가 쉽지 않은 것이 바로 고기란 뜻이다.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데 왜? 하지만 그냥 굽기만 해서는 먹을 수 없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내가 어렸을 적에도 고기를 먹다가 다 씹지도 못하고 뱉어버리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는 것이다. 고기 자체도 질기고 냄새가 나는데다 요리할 때 힘줄도 제대로 제거하지 않았다면 바로 일어나는 일이다.

 

오래전에는 돼지나 소나 모두 놓아 길렀었다. 산이며 들이며 돼지를 풀어놓아 마음껏 먹이를 찾아먹도록 내버려두었다가 때가 되면 잡아다 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소야 당연히 농사일도 함께 하는 일소였었고. 그래서 예전에는 돼지지방으로 라드를 만들려면 내장에 붙은 내장지방을 쓰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그렇게 열심히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데 돼지든 소든 몸에 지방이 그리 많이 쌓여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알아서 일하고 뛰어다니느라 열심히 쓰이며 지방조차 없이 단련된 고기의 육질이란 과연 어땠을까? 사람들이 풀을 먹여 키운 호주산 소고기를 싫어하는 이유 그대로다. 단단하고 질기고 무엇보다 냄새가 심하게 난다. 음식찌꺼기를 먹여 키우던 예전 돼지고기에서도 그래서 누린내가 아주 심하게 났었다. 그냥 생으로 구워서는 아예 못먹을 정도였었다.

 

돼지고기로는 국을 끓이지 않는 진짜 이유다. 소는 그래도 국으로 끓이면 악취까지는 나지 않지만 돼지고기는 다르다. 돼지고기는 그래서 찌개를 끓일 때도 양념을 아주 세게 해야지만 겨우 먹을 만해진다. 고기를 구울 때도 아주 강한 양념으로 맛과 냄새를 모두 눌러 놓아야 거부감없이 먹을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그냥 돼지고기 아무 부위나 갖다가 그냥 생고기째로 구워도 거의 먹을 만한 정도는 나와준다. 굳이 강한 양념에 바싹 굽지 않아도 거부감없이 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그러자고 돼지들을 우리에 가두고 정해진 사료만을 먹여 키우는 것이겠지만.

 

고기를 그냥 구우려 해도 막상 불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역시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굳이 고기를 숯불에 구워야 했던 것은 장작불에 구우면 바로 타버리니까. 그나마도 숯불조차 불조절이 쉽지 않았던 탓에 매번 굽다 말고 몇 번이나 찬 물에 식혀 다시 구워야만 했었다. 태우지 않고 굽기 위해서는 아주 얇게 저며서 굽거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열을 가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익히거나, 그도 아니면 겉이 타거나 속이 덜 익는 상황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얇게 저며서 굽는 맥적이 나왔던 것일 테고, 그런데도 태우지 않으려니 설야멱이 되었을 것이고, 아예 국물을 부어 익히는 서울식 불고기가 발명되었을 것이다. 

 

즉 지금 우리가 생고기를 바로 불에 구워 먹을 수 있는 자체가 문명의 소산이란 것이다. 생고기를 바로 구워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그동안 가축을 사육하고, 고기를 조리하는 모든 과정들이 고도로 발달해 온 결과란 것이다. 품종을 개량하고, 사육법을 개선하고, 여기에 불조절까지 가능해지면서 더이상 복잡한 조리법이란 고기의 맛을 해치는 번거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과연 삼겹살을 그대로 구워먹는 것보다 굳이 몇 시간이나 들여 동파육을 만들어 먹는 것이 맛이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대단한 이점이 있다는 것일까. 오래전에는 상당한 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대충 구워도 바로 입안에서 연하게 씹히고 넘어간다. 

 

그냥 동파육 만든다고 설치다가 문득 떠오른 깨달음 같은 것이다. 물론 만들어놓고 나니 맛있기는 한데 굳이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만한 맛일 것인가. 그냥 삼겹살 자체를 기름장에만 찍어먹어도 이만큼 맛있지 않은가. 동파육 만들기가 귀찮아져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동파육 조리법으로 뒷다리살을 삶아도 분명 삼겹살보다 더 연하고 맛있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좋은 고기라면 그냥 구워도 맛있다.

 

말 그대로다. 좋은 고기는 그냥 굽고 삶기만 해도 맛있다. 양념은 아주 최소한으로 약간의 기름장만으로도 충분히 그 풍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다. 양념이 강할수록 고기 자체는 맛이 없다. 예전에는 양념해 굽는 요리가 주를 이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냥 굽는 방식이 더 주를 이루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렸을 적 고기를 굽는다면 반드시 양념에 잰 고기였지만 지금은 그냥 생으로 바로 불에 굽는다. 그 차이지 않을까. 귀찮아서가 아니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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