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설득하는 것, 다른 하나는 설득당하는 것. 사실 어법이 맞지는 않다.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하는 것이고,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추종하는 것이니까.
뭐냐면 내 의지를 강요하여 관철하느냐, 아니면 상대의 의지를 쫓아 그에 복종하느냐다. 소통이란 이 둘 가운데 존재한다. 설득할 것이냐, 아니면 설등당할 것이냐.
흔히 생각한다. 많이 듣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라주는 것이 관용이라. 따라서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고 중요하다.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누군가 자기 의견을 말하는 법 없이 듣기만 하고 따라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거둘 것이다. 한 마디로 믿음이 안 간다. 어떻게 믿는가? 자기 주관 없이 그저 남 하는대로만 듣고 따른다는데. 당장은 내 말을 듣더라도 다음은 다른 사람 말을 들을 것이다. 가장 먼저 배제당한다. 경멸당하거나.
오히려 일방적으로 자기 의지만을 강요하는 쪽에 사람들은 신뢰를 보낸다. 사람이란 원래 명령을 듣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권위 앞에 복종하기는 익숙해도, 복종하는 앞에 자신을 다스리기란 쉽지 않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 자기를 지키기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기를 낮추기보다 어렵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갑자기 높은 자리를 주어 그에 대처하는 법을 보기도 했었다.
다만 문제라면 권위란 결국 무오성에서 나타난다는 것. 자기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오류가 있거나 해서는 오히려 반발만 사고 만다. 한 마디로 만만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만만하게 보여지는데 거기에 명령을 한다? 이건 또 사람들이 못 참는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다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항상 무오류일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강요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따르기에는 믿음을 주기 힘들다. 결국 그 사이에서 그 선을 정할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는 따르고, 어디까지는 지키고.
아티스트가 정치가와 통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아티스트는 기본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다. 강요하는 사람이다. 강제하는 사람이다.
"이게 내 작품이야!"
"이걸 봐!"
"이걸 들으라구!"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는 소수만 만족시켜도 좋다. 반면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은 보다 다수의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하기에 조금 더 세심하게 선을 지킬 필요가 있다. 자기를 주장하되 그러나 대중의 목소리도 들을 필요 있다.
독재자도 마찬가지다.
"나를 따라!"
"나를 따르라구!"
"내가 옳다니까!"
독재란 곧 정의다. 오로지 자기가 정의로울 때 독재가 된다. 소통이란 없는 강제고 강요다. 그리고 그보다 양호한 정치가들은 대신 대중의 눈치를 보며 그들과 타협하려 한다.
원래 대중이란 오만하다. 그리고 비굴하다. 거만하고 비겁하다. 허세를 부리면서 그러나 소심하다. 아주 지랄맞은 것들이다. 바로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을 꽂는다. 나는 그래서 특히 인터넷에서의 관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에 눈치를 보며 따라가려 해서는 결코 대중을 설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의심을 받고, 만만하게 여겨져 능욕당하며 비웃음과 경멸만을 사고 만다.
어찌해야 하는가. 대중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선을 스스로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란 없다.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인 자기 영역이다. 그게 정치적 신념이고 아티스트로서의 미학이다. 그런 때 사실 대중도 납득할 여지가 생긴다.
내가 남자의 자격에 대해 이제 와 거의 아무말도 하지 않는 이유, 그들만의 방식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굳이 보지도 않는 프로그램들에 대해 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유도 그렇다. 납득했기 때문이다. 나와 그들과는 맞지 않다. 그러면 청춘불패는?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바뀌어가는 청춘불패가 아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청춘불패만의 어떤 개성이고 주장이다.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무엇을 들려주려 하는가.
오히려 내가 가장 불편하게 여긴 것이 누군가 말한 인터넷 여론을 신경쓰며 거기에 맞춰가는 듯한 어떤 방식들이었다. 중심없이 흔들리는 모습들이었다. 과연 청춘불패에 나를 납득시킬만한 무언가가 있는가.
이것은 구하라의 노래에 대해서도 내가 한 번 이야기했던 바다. 이것이 내 노래다 확정짓고 나면 그 다음에는 노래를 잘하네 못하네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고. 마찬가지로 불관용적이고 비타협적인 자기 주장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다. 너무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은 거부감이 있지만, 그러나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은 아예 경멸하게 된다. 오히려 자기주장만 하더라도 익숙해 지면 그 당당함이 믿음직하게 여겨지지만, 자기주장이 없다면 처음에는 친근하다가도 오히려 얕잡아보는 마음만 생긴다.
결국 선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언가. 그 다음에 듣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무조건 듣고 따르기만 하는 것도 일종의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을 신경쓴다 했던가. 인터넷의 반응을 일일이 모니터하고 그것을 프로그램에 반영한다.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 안에서도 그같은 부분들이 있었다. 인터넷 댓글이며 게시물을 신경쓰며 일희일비하는 모습들이. 그런 것이 얼핏 시청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지만 중심이 없는 것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고작해야 인터넷에 휘둘리는 방송이라...
물론 패떴처럼 아예 대놓고 시청자와 싸우는 것도 우습기는 하다. 그러나 이건 우스운 정도가 아니다. 도대체 뭘 기대하고 프로그램을 보라는 건가. 그곳에 기대할만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가.
솔직히 아직도 설마다. 아무리 그래도 PD이고 방송작가인데 고작 인터넷 여론따위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프로그램을 만들까. 그렇게 자신이 없나? 설마설마 아니길 바라지만...
아무튼 참 인터넷이라는 게... 나도 인터넷에서 글쓰고 놀지만 그게 그닥 쓸만한 게 없다. 말만 많았지 실속이 없다. 신경쓸 것은 그보다는 PD로서의, 작가로서의, 그리고 출연자에 대한 어떤 믿음이 아닐까. 오만하고 어디 쓸 데도 없는 댓글이며 블로그가 아니라 말이다. 내 블로그 포함이다.
평가가 먼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다. 출연자에 대한 믿음이 먼저이며 자기 작품에 대한 믿음이 먼저다. 평가는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아니라면 아예 시작도 말아야겠지. 그런 걸 뭔 기대씩이나 하고 보겠는가. 그거야 말로 시청자에 대한 모욕이다.
어차피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도 없다. 반대자는 존재한다. 안티는 반드시 따라온다. 그러면 누구에 충실할 것인가.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득당하더라도 먼저 설득하고, 결국에 듣고 따르더라도 한 번 자기 주장을 해보기도 하고, 나를 믿고 따르라 해보기도 하는. 특히 창작자라면. 생산자라면. 당연한 이야기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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