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 과연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칼에 찔려서도 아플 것이고, 총에 맞아서도 아플 것이고, 말기암도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역시 가장 큰 것은 소외감 아닐까.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정확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실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기를 찾는다. 나를 통해 타인을 보고 타인을 통해 나를 본다. 나를 통해 타인을 정의하고, 타인을 통해 나를 정의한다. 그게 또 관계다. 그 관계 속에 사람은 살아간다. 그런데 그 관계가 단절되면?
하다못해 사귀던 여자와 사귀고서도 한참을 멍하게 뭘 해야 할 지 모른다.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앞으로 뭘 할 수 있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나오는 것이. 그 극심한 상실감이.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면서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며 자기도 지워지는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그래서 사람이 겪는 스트레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한다. 특히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몇 년을 마음고생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보면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없을 때, 더구나 사회생활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관계가 활발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그게 그렇게 큰 스트레스란다. 남편이란 많은 경우 여성에게 세상을 통하는 창구였기에. 반면 남자들은 의외로 금방 딛고 일어난다고. 늦으막이 나이 들고서가 아니라면. 같은 맥락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겠지. 많은 사연들이 있었을 것이다. 남의 속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을까.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카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남은 사람들은 어찌하라고..."
재작년 누나가 죽고 그나마 의욕적으로 준비하던 연예계 복귀마저 미룬 채 두 조카의 외삼촌으로 아버지 대신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정작 자기 자신을 버리고 누나의 동생이 되었고,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고, 두 조카의 외삼촌이, 아버지가 되었다. 최진영이라는 자신이란 없이. 얼마전 인터뷰에서도 연기를 다시 시작하겠다면서 꺼낸 이야기가 두 조카였다.
물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어머니를 잃은 조카들에게, 아버지도 없이 외삼촌은 아버지와 같았을 테니까. 누나마저 세상을 뜨고 동생이 두 조카를 보살피는 건 우리의 정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생활까지 포기하고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그러고 보면 그 전부터도 최진영은 최진실의 동생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을 곧잘 내비치고 했었다. 어떻게 해도 인간 최진영이 아니라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그리고 달리 들려오는 이야기로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여전히 자신을 동정적인 눈으로 보는 것에 거북해 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상인가.
원래 착한 사람이 잘 죽는다. 나처럼 나쁜 사람은 죽으려고 해도 잘 죽지도 않는다. 나라면 차라리 두 조카를 외면하고 내 삶을 살았을 것이다. 물론 두 조카를 보살피기야 했겠지만 그보다는 내 삶을 최우선으로 여겼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자살과는 거리가 있다. 이기적이고 본능에 충실하거든. 그러나 착한 사람들은 곧잘 자기마저 희생하며 남을 위하기에, 그래서 그로 인한 상실감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한다. 그런 것을 견디기에는 또 너무 순수한 때문이다. 물론 순수하다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쩌면 순수하기에 사람은 더 상처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최진영도 조금은 더 이기적이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최진실의 동생이라는 위치를 오히려 이용하며 즐기려 하고, 최진영의 두 아이에게 아버지가 되기 보다 새삼 세상의 관심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려 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는 너무 순수하고 순결해서.
나는 그래서 최진영을 동정도 원망도 않는다. 그것은 또 그 나름의 치열한 선택이었으리라. 남들은 모를 그 자신만의 고통 속에서 싸우고 견디며 끝내 내린 결론이었으리라. 충동이었든 아니면 우발적이었든 그것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 비롯된 것이니. 누구도 알지 못할. 단지 그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기를.
참 안타깝다. 기억한다. 아마 내 기억에 최진영의 마지막은 "우리들의 천국"에서 전도연과 커플로 나오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장동건, 김찬우 등과 친구로, 전도연의 남자친구로, 그러다가 중간에 실제 군대에 가버렸다. 그리고 제대했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SKY던가 밴드 만들어 음악을 하더라도. 부활 12집 파트2에 리메이크된 백야가 그때 최진영이 부른 노래였다. 그리고 한참을 잊혀졌었는데...
떠난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남은 사람을 아쉬워하지 말고, 떠난 사람을 슬퍼하지 말고, 남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이미 한 번 떠난 이상 세상의 인연은 끝난 것이니. 그는 떠나고 남은 사람은 남고 또 남은 사람은 남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농담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오보일 거라고. 참으로 왜 이리들 죽는 사람들이 많은지. 나이 지긋이 들어 벽에 똥칠하며 온갖 추한 꼴 보이다 죽으면 안 되는 것인지. 치매로 기억이 깜빡거리더라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검버섯이 핀 얼굴이 흉해도 그래도 정이 떨어지도록 살다가 죽으면 안 되는 것인지.
아, 나조차 떠난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 슬퍼하고 있었다. 분노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사람이라. 떠난 사람을 원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본능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함을. 서로가 이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느즈막이 집에 들어와 인터넷을 켜고는 기분이 우울하다. 모르는 사람이 죽어도 마음이 짠한데, 전혀 아무 감정이 없어도 결코 마음이 편치는 않을 텐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자체가 나름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리라. 더 이상 죽는 이가 없기를. 추해져도 살아갈 수 있기를. 추해서도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떠난 사람의 명복을 빌며. 남은 어머니나 환희, 준희 두 조카에게도 더 이상의 큰 상처가 없었으면.
덧붙이자면 우울증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그건 예고도 없이 아무때고 찾아온다. 죽으려 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죽어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나름 또다른 삶을 위한 투쟁일 것이다. 절망과 좌절에 대한. 소외와 고독에 대한. 상실과 허무에 대한. 누구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대로 보내주는 게 옳다.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이 또한 사람이 사는 방식이니. 사람은 누구도 서로를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떠났고 남은 사람은 이렇게 남았다. 가는 그 길 만큼은 편안할 수 있도록.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부디. 잘 가시라. 마지막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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