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거의 상식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한 번 상기해 보자면 매슬로우의 욕망의 단계설은 욕망을 다섯 단계로 나눈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자존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매슬로우는 처음 이 다섯 단계의 욕구에 대해 단계적으로 실천된다고 했다가 이후 단지 다섯 단계의 욕굼만 있을 뿐 정해진 순서는 없다고 입장을 바꾸고 있었다. 생리적 욕구가 실현되기 전에도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할 수도 있고... 예를 들어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인데도 예술혼을 불태우는 예술가처럼.
그러나 일단 인간도 동물이기에 살아있는 이상 보편적으로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은 첫번째 생리적 욕구일 수밖에 없다. 먹고 입고 자고 싸고 섹스하고 후손을 남기는... 그건 거의 본능이다.
과거에는 그래서 그런 게 중요했다. 먹고 살기 위해 기타를 잡았다. 먹을 것을 준다기에 축구공을 찼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트랙을 돌기도 했었다. 반드시 성공해서 지금의 가난을 극복해 보겠다. 특히 복싱에서 그같은 눈물겨운 성공스토리들이 많았다. 집안을 일으켜 보겠노라.
그래서 그때까지만도 헝그리정신이라는 게 의미가 있었다. 배고픈 것이다. 당장의 가난이 싫고, 가난으로 인한 소외와 업수이여겨짐이 싫고, 여기서 나아가 성공이라고 하는 주위로부터 인정받겠다고 하는 자존의 욕구까지 더해지며 많은 이들이 성공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고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노찾사의 "사계"와 거북이의 "사계"가 다른 것처럼 시대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성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경제적인 성장은 단순한 물리적인 성공 이상의 또다른 성취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남들과 다른 나, 나라고 하는 정체성, 즉 꿈이며 자아실현이었다.
제법 번듯하게 사는 집의 자식들이 굳이 집을 나와 그 고생을 하며 연습생 생활을 거쳐 연예인으로 쉽지 않은 현실을 견뎌낸다는 것. 솔직히 돈 벌자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는 것이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자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럴만한 여건에 있는 경우가 이제는 연예계에도 많다. 먹고 살자고... 그래서 성공해서 집안 일으켜보겠다고... 그런 궁상맞은 이야기는 이제는 진부하다는 거다. 지금에 와서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연예인이 되고 싶으니까. 연예인 자체가 꿈이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헝그리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충족되지 않았기에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것을 헝그리정신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시대는 바뀌었고 욕구의 추구나 실현 역시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헝그리가 그 헝그리가 아니다. 아니더 나아가 과거처럼 고통을 힘들게 극복하고... 그게 아니라 그 힘든 과정조차도 즐길 수 있는 그런 시대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헝그리정신이 생리적 욕구, 혹은 자존의 욕구와 관계가 있다면 지금의 아마도 헝그리 정신이란 자아실현의 욕구에 가까울 것이다. 나를 발견하고 나를 실현하는. 나라는 가치 자체를 추구하는.
돈을 벌려고도 분명 있다. 인기를 얻고 싶다? 그것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보다 순수한 목적 - 연예인 자체가 좋다. 혹은 음악이 좋고, 연기가 좋고, 무대에 서는 것이 좋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를 위한 과정도 즐겁다. 그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나 그를 실현하고 나서의 모든 일들이 역시 즐겁다. 과거처럼 힘들어도 억지로 참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겁기 때문에. 즐거워서.
물론 말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는 것이다. 헝그리정신이더라도 그것이 단지 성공 그 자체만을 위한 비장함을 뜻하기보다는 성공을 통한 자기실현을 위한 어떤 유희적인 태도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써 즐긴다. 이제는 그렇게 비장해서 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특히 버라이어티에서. 생계형으로 비장해서야 오히려 보는 사람만 부담스럽다. 버라이어티의 시대, 진정 통할 수 있는 것은 방송을 즐기고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 때 시청자도 공감하고 재미를 느끼게 된다. 재미가 호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헝그리정신... 힘들던 시절 어쩔 수 없이 했다... 아니라는 거다. 그것이 꿈이기에 즐겼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한 점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다. 지금의 헝그리정신일 것이다.
가끔 헝그리정신 운운하는 것을 보면 불편한 이유다. 카라가 생계형인 이유도 그같은 헝그리 때문은 아닐 텐데. 그보다는 좋아서. 그 자체가 좋아서. 최선을 다하며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 아니던가. 생계형이 곧 헝그리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생리적이거나 자존적 욕구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가요순위프로그램에서의 1위란 따라서 단지 그동안 실현해 온 것들에 대한 보상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없는 것이고.
하긴 연예계만이 아니다. 스포츠에서도 언제까지 헝그리정신론인가? 배고파서 열심히 하고... 그런 시대는 지났다는 거다. 축구 그 자체가 좋아서. 혹은 야구 그 자체가 좋아서. 승리가 좋아서. 승리의 성취감이 좋아서.
일도 마찬가지다. 먹고 살려고...? 물론 그렇게들 시작한다. 그러나 끝은 역시 그 자체가 좋아야 한다. 그 일이 좋아서 하고, 그 일에 만족하니 하고, 그 일로 성취감을 느끼니 하고, 그래서 일이 단지 스트레스이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다. 여전히 먹고 살려고들 일을 하지만 그보다는 이제는 자기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보다 실존적인 욕구들이. 즐길 줄 아는 시대. 즐길 줄 알아야 하는 시대.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즐길 수 있는 그런 시대라는 거다. 그런 헝그리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의미에서도 많이 쓰기는 하지만, 그러나 헝그리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라는 것이. 어렵고 힘들고... 그러나 그조차도 충실하게 즐길 수 있을 때. 그 충실함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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