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권위주의와 대중예술...

까칠부 2010. 6. 1. 16:11

권력이란 곧 정의다. 지록위마라 하지? 내가 사슴을 두고 말이라 하면 말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은어라 하면 은어고 도루묵이라 하면 도루묵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권력이고, 그러자는 것이 또 권력이다.

 

그래서 권력은 오답을 용납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오류란 존재할 수 없다. 오류란 바로 권력의 본질인 정의 그 자체를 훼손시키므로. 그래서 권력 앞에 답은 하나 뿐이다.

 

객관식을 떠올려 보면 되겠다. 분명 많은 다양한 생각과 입장이 있을 것이다. 오로지 그 하나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객관식 문제에서 답은 그 하나 뿐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논거를 가지고 자기 답이 옳다고 주장해도 이미 답은 그 하나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시험을 치르는 입장에서는 그를 당연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권위주의라는 것이다. 권위주의란 그래서 일방적이다. 오로지 권력이 요구하는 한 가지만을 대중에 강요한다. 이탈은 용납지 않는다. 일탈은 허락지 않는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도덕주의와 엄숙주의를 동반한다.

 

남자가 머리를 기르고,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경찰이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자르고, 자를 들고 다니며 치마의 길이를 재며, 유치장에 가두어 제제한다. 남자 머리 긴 거 싫어하고, 여자 옷 짧은 것 싫어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강제할 수 있는 것이 곧 권위주의라는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히틀러의 치하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예술이란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다. 권력이 제시하는 정답을 쫓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것은 퇴폐적이고 불순하며 불결하다. 하물며 권위에 거스르거나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박정희 때도 그랬다. 김추자가 춤을 출 때 손가락으로 어디를 가리켰다고 북한에 보내는 지령이란다. 사실은 공화당 행사에 불려가 노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중현이 음악활동을 금지당한 것도 대마초보다는 권력의 눈에 거슬렸다는 것이었다. 박용식이나 김명덕이나 단지 권력자와 닮았고 희화한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이주일도 못생겼다는 이유로 보기 흉하다고 밤무대를 전전했었다. 이경규가 우스개로 말하지. 자기도 그럴 뻔 했다고.

 

정답만을 요구하니까. 락도 정답이 아니었다. 포크도 정답이 나이었다. 그래서 80년대 초반에는 트로트만이 남아 있었다. 대학가에서 불던 밴드바람도 그때는 주춤해 있었다. 포크가수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오로지 어르신들 듣기 좋은 트로트만. 최헌, 최병걸, 윤수일, 조용필, 혜은이...

 

나는 그래서 도대체 대중예술인들이 권위주의 정권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영남도 절친노트 나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벌하고 살 떨였다고. 그런데도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나는 안전했으니까? 나는 당하지 않았으니까?

 

많이들 해외로 떠나고 했었다. 국내에 머물지 못하고 해외로 도망치듯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도저히 이 땅에서는 견딜 수 없으니까. 설마 그런 시절이 20년도 넘게 지나 다시 오리라고는...

 

그러나 뭐라 못하는게 그런 정부가 지지율 50% 이상이라지 않은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정부란 그 국민이다. 지지율이 이 정도라면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게 엄숙주의가 강하지. 그렇게 도덕주의가 강하다. 아이돌 옷차림 하나 가지고도 그리 시끄럽고. 연예인 말 한 마디에도 그리들 난리고. 어디 갈까?

 

뭐라 더 말하고 싶지만 입만 험해질까봐. 말하지만 누구를 탓할 게 아니다. 누가 지금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어느 한 개인이? 비겁하다. 모두다. 이 사회 전체다. 그것을 알기를. 깨닫기를.

 

답답하다. 들려오는 뉴스들이 더욱. 뉴스는 건강에 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