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뜬금없는 정인의 실신이냐는 기사를 보았다. 역시 코드의 차이다. 순정만화를 즐겨 본다면 그것이 그다지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하자면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무협을 보지 않는 입장에서야 도대체 그게 무언가. 하지만 무협을 즐겨보는 입장에서는 또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대가 있다. 패러디를 하든 오마주를 하든 그것은 무협의 한 부분이다.
클리셰라는 것이다. 장르의 약속이다. 순정만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전환점이 될 사건이 필요하다. 생뚱맞게 놀러가서 길을 잃고, 처음 가는 산길을 둘이 헤매고 다니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아니 전개상 여기서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 필요하다. 강무결과 위매리의 갈등이 깊어지는 순간, 그리고 정인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국면을 바꿀만한 계기가 나타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정인이 부상을 입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하필 실신.
하지만 그대로 아닌가. 정인의 실신을 계기로 모든 것이 급격히 마무리된다. 강무결은 다시금 위매리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정인은 아버지로부터 비로소 홀로설 각오를 다지고, 위매리는 그런 가운데서도 정인이 아닌 강무결을 선택할 것을 결심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아니나 다를까 결혼식장에서 정인과 위매리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정석과 위대한 사이의 관계도 그렇게 정리되고.
사실 의미가 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이나, 판타지에서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순정만화에서 사고를 당하는 것 등등... 때로 주요 인물이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부활이다.
예로부터 저승은 땅 밑에 있다고 여겨졌다. 동굴은 자궁이다. 다치거나 혹은 정신을 잃거나, 죽음이다. 다른 나라로, 혹은 어디 멀리 떠나는 것 역시 이승을 등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진중권이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할 텐데. 그렇게 인위적인 장치를 통해 주요인물을 죽였다 부활시키고, 이제까지의 갈등을 그 힘을 빌어 해결한다. 역시 장르적 공식이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단지 아버지의 등만을 바라보던 아이에서 정인이 아버지로부터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어른으로 거듭난 것이 그 예다. 아니 오히려 어른으로 거듭나면서 정인은 아이가 되어 버렸다. 역시 그 계기는 지난주 보였던 정인의 눈물. 정인의 눈물은 억압되어 있던 그의 자아인 동시에 그가 억누르고 있던 순수라 할 수 있다.
얼마나 귀여운가. 강무결과 동거하면서 서로 신경전하는 모습이. 특히 위매리가 만들어준 삼계탕인가? 대추를 집어주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 표정이란. 강무결이 대추를 집어주자 다시 김치를 집어주어 보답하려니 강무결은 그것을 거부하고. 강무결의 집은 정인으로 하여금 편안히 쉴 수 있는 - 본모습을 찾게 해주는 역시 어머니의 자궁이다. 집이란 원래 자궁의 이미지를 갖는다.
죽음으로써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자궁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버린 정인으로 인해 위매리와 강무결도 어른이 만든 주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그들은 이미 아이가 아닌 어른이니까. 그렇게 그들도 어른이 된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마도 위매리의 변화된 패션.
마치 아이와도 같은 어수선하며 화려한 보헤미안풍의 스타일에서 어느새 어른스런 단정함으로 바뀌고 있다. 그 기점은 역시 결혼식장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결혼을 거부할 때부터. 그때부터 그녀 역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강무결이라는 동생인지 아들인지 남자친구인지 모를 혹이 딸리게 되었지만. 아마 강무결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아이인 채로가 아닐까. 어머니를 동경하는 위매리에게는 그것이 더없이 어울릴 수 있겠지만.
서준이 악역이 아닌 것이 참 아쉽고. 보아하니 정인과도 잘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친구로 남은 것도. 어쩌면 뜻하지 않게 여성성을 거세당한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강무결에 대한 감정을 포기하면서 서준은 극격히 여성성을 잃고 평면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정인에게 친구라 말하는 자체가 더 이상 여성이 아님을 확인하는 것. 그녀를 여성으로 대하던 이안조차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어차피 정인도 남성은 아니니까. 오빠는 남성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 버린 오빠는 차라리 아빠에 가깝지 남성으로 보일 수 없다. 조금 성급하게 마무리지은 듯한 느낌? 어울리지 않게 아빠미소를 짓고 있는 정인도 그렇고, 어느새 누나가 되어 강무결을 지켜보는 서준도 그렇고. 시청율이 그러했으니.
마무리는 이제까지 가운데 최악이었다. 설마... 설마... 분명 다음주부터는 드림하이가 예약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아, 그러고 보니 한 주 결방으로 회수가 홀수다. 기본적으로 짝수로 맞추는 것이 관행임을 비추어 볼 때 역시 의심을 않을 수 없다. 드림하이는 사실 그렇게 땡기는 드라마가 아닌데.
어쨌거나 일관된 마무리가 좋았다. 드라마가 아니라 감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일관되게 어른과 아이의 이야기로 감상을 쓰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네러티브 구조니까. 아이의 성장과 어른과의 투쟁과 극복. 그리고 구원. 강무결은 위매리로 인해 구원받고, 위매리는 정인과 강무결을 통해 아버지를 극복하고, 정인은 역시 위매리로 인해 아버지와 투쟁하여 홀로서고.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한 관념이라. 상당히 전형적이면서도 정석적인 구성이었다고나 할까.
아마 말했듯 만화에 - 특히 순정만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고 생경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나 순정만화에 익숙하고 좋아한다면 또 다르게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혹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즐겁게 - 낮은 시청율따위 신경쓰지 않고 재미있게 보았던 것이었고.
김재욱의 연기는 참 좋았다. 아주 디테일하게 살아있는 감정의 선이 정인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가까이 느끼도록 했다. 서준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아진 것 같고. 문근영은 마지막 어른이 되어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난 모습이 어색했다. 전반적으로 캐릭터를 가장 잘 이해하고 묘사하지 않았나. 장근석은 가끔 지나치게 허세를 부리는 듯한 연기가 걸림돌이었다. 원래 강무결의 캐릭터가 그렇다 치더라도. 잔가지가 없어서 오히려 명쾌하고 좋았던 드라마였달까? 물론 내게 있어.
기대만큼은 했던 드라마였다. 그 이상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림도 예뻤고 배우들도 예뻤다. 한 편의 멋진 순정만화를 보는 것처럼. 사실 원수연보다는 누구더라... 이런 스타일의 그림이 어울리는 작가가 있었는데. 시청율이 낮아 아마도 급히 종결지은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만족했던 순간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재미있었고, 또 간만이라는 신선함과 반가움이 좋았다. 드라마로서도 이렇게 멋진 만화를 그려낼 수 있구나. 의도한 바인지 어떤지 PD에게 감탄하는 바다. 즐거웠다. 멋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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