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다 늙어서 어린 계비를 들이게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하기는 영조도 그랬다. 다 늙어서 새파란 어린 아가씨를 비로 맞아들였다.
중궁을 비워서는 안된다. 왜? 바로 그들의 선조인 세조 때문이다.
왕실에 어른이 없었다. 혜빈 양씨는 후궁이다. 서모다.
조선 전기까지 친모가 아닌 아버지의 배우자에 대해 자식으로서의 의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세종의 후궁이라는 권위로도 정작 적통인 세조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조를 누르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권위가 필요했다.
문종이 다시 장가를 가서 후비를 들였다면,
그래서 후비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단종의 배후를 든든히 지키고 있었더라면.
세종의 고명대신들도 그런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왕실의 일족이 아니다. 외부인이며 단지 신하에 불과하다.
세종의 아들이며 문종의 아우였던 세조에 비해서는 정통성이 한참 부족하다.
종친부까지 나서서 세조의 등을 떠밀었다.
반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예종의 뒤에는 정희왕후가 있었다.
성종의 뒤에도 인수대비가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교훈을 얻는다. 왕실에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싫어도 장가를 가야 한다. 물론 싫을 까닭이 없다.
이미 세자가 있다. 후사가 정해진 뒤다. 굳이 장가를 가서 후계를 꼬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광해군과 정조의 발목을 붙잡는다.
나비효과였을까?
하기는 세조의 찬탈로 말미암아 이후 구성군이 죽고 남이가 역모로 몰렸다.
왕실의 일원들은 하나같이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채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세조의 직계 역시 그렇게 단절되고 말았다.
예종은 차자다. 성종도 차자였다. 장자게에서 이어진 직계는 이후 역모에 몰려 사라지고 만다.
아주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꼬아버린 세조다.
만일 세조만 아니었다면?
김종서와 이징옥과 성삼문과 박팽년이 이후로도 살아있었다면.
신숙주 역시 문제없이 살았을 것이다. 신숙주가 합류한 것은 계유정난 이후이니.
재미있다. 결국은 선조의 업보가 후손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명분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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