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세조와 사림...

까칠부 2013. 8. 31. 09:19

요즘은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국사를 배우며 당했던 사기 가운데 가장 처절했던 것이 바로 훈구파였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훈구파에 비해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사림이 집권하며 조선은 정체되었다.


사실일까?


물론 여기에서 당시 교과서는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파두고 있었다. 관학파였다.


관학파란 한 마디로 정부주도의 학문을 연구하던 집단을 뜻한다.


반면 사림은 관학파와는 달리 개인적인 연구를 주로 하던 이들을 대비하여 일컬어 부르던 것이었다.


관학파의 대표가 바로 집현전이다. 그러면 집현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계유정난 당시 집현전은 수양대군을 지지했었다.


당연했다. 권신이 왕의 머리 위에서 마치 꼭두각시처럼 왕을 조종하려 한다.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인사적체로 말미암아 집현전 학자들에게 관직이 주어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신숙주와 같은 이들은 관계로 나가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 싶은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한 일이란 단종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었다.


집현전 학자들 가운데 소수만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다수는 이를 바로잡고자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바로 사육신의 참변이다. 그리고 사육신과 함께 세종이 이루어 놓은 집현전은 해체되어 사라진다.


다수의 집현전 학자들이 사육신과 함께 죽거나 쫓겨났고 살아남은 소수는 관리가 되고 권신이 되었다.


문제는 조선은 유교의 나라라는 것이다. 


권력은 백성이 아닌 성리학적 명분과 이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왕이 왕인 이유도, 왕이 지존이라 불리우는 이유도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다.


지배계급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성리학의 명분과 이론은 반드시 필요했다.


관학파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누구로 대신해야 하겠는가?


그래서 성종은 홍문관을 세웠다. 그 전에 세조 역시 사림을 등용하고 있었다.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지방의 유지이던 사림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사림에게 관직을 허락하고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훈구대신의 전횡을 견제한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조선 중기 이후 사림간의 대립이 격화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학은 사학이다. 사적인 연구는 사적인 연구로 끝나야 한다.


관학이 있어 조정의 권위를 뒷받침하며 유학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관학이 사라졌다. 사림이 관학을 대신한다. 그리고 사림은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정조는 규장각을 세웠다. 관학을 다시 살리려는 의도였다.


이 무렵 사림 내부에서는 호락논쟁이 벌어진다.


호서지방의 전통적 노론집단이 내세우던 명분론과


경기지방의 세속적 노론집단이 내세우던 현실론이 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조에 의해 하나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아마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고, 순조가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 않았다면


조선후기의 역사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 번 무너진 관학의 전통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사학의 대립이 조정으로까지 확산되며 오히려 혼란을 불러왔다.


그러면 사림이 문제였는가.


명종 때까지 훈구파가 저지른 전횡은 조선의 내정을 극도로 피폐케 만든다.


지주로서 대농장을 겸병하며 농민을 수탈하고 국고를 착복했다.


그 모든 잔재를 해결한 것이 바로 선조다.


선조가 아니었으면 과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그리 버틸 수 있었을지.


그 좋아하는 훈구파가 집권한 명종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면 조선은 끝났다.


백성들이 먼저 나서서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리라.


그리고 선조의 개혁을 도운 것이 바로 사림들이었다.


선조 때 유독 사림의 인재가 많이 등장한 것은 그만큼 선조가 요긴하게 쓴 때문이다.


너무 사림이 커지는 바람에 기축옥사라는 초유의 옥사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조선의 폐단을 살펴보면 거의가 세조로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세종의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그 유산은 세조에 의해 거의 사라지고 폐단만 남게 된다.


그럼에도 세종이 이루어 놓은 것이 워낙 대단하기에 성종의 전성기가 열리지만,


바로 이어진 연산군의 폐정과 중종과 명종 때의 훈구파의 전횡은 그로부터 씨가 뿌려진 것이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어도 정치는 잘했다?


글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군사기술의 발달도 문종대까지의 눈부신 성과에 비하면 세조에 이르면 정체되기 시작한다.


이래저래 조선사에 끼친 악영향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집현전이 남아있었다면. 관학이 중심을 잡아주었다면.


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사단칠정논쟁도 호락논쟁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주기롱과 주리론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 게다.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앞과 뒤가 있다.


조선 성리학의 발달은 또한 세조로부터 비롯된다. 집현전을 해체했다.


아무튼.


아침부터 세조부터 욕하고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