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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와 은하영웅전설...

까칠부 2013. 9. 24. 17:48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중반에 자유행성동맹의 마지막 명운을 걸고 양웬리와 라인하르트가 싸우는 장면이 있다. 여기에서 라인하르트는 깊은 종심을 이용 양웬리의 돌파를 저지하려다 결국 양웬리의 함대에 기함을 포착당하는 수모를 겪고 만다. 이때 라인하르트를 구원한 것이 아마 마린돌프의 지시를 받은 미터마이어였을 것이다. 하이네센으로 바로 진격 자유행성동맹 수뇌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자유행성동맹의 명령으로 양웬리의 모든 전투행위는 종식되고 만다. 라인하르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다.


아마 제법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장면이었을 것이다. 군인으로서 자유행성동맹이라고 하는 조국을 지켜야 할 의무를 부여받고 있다. 라인하르트만 죽일 수 있다면 어쩌면 최악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유행성동맹에도 기사회생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의무 역시 부여받고 있다. 문민통제의 민주주의 국가의 군인으로서 정부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한다. 전쟁을 끝내라 한다면 끝내야 한다. 군대는 지휘관 개인의 사병이 아니다.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의 습격을 받고 김종서가 바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죽은 것은 김종서를 몸으로 가렸던 큰아들이었고 정작 김종서는 살아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판단이 갈린다. 조선의 군권을 한 손에 쥔 권신으로서 자의로 군을 움직여 수양대군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국왕의 신하로서 국왕의 재가가 떨어지기까지 기다려 군을 움직일 것인가? 김종서에게 권력욕이 있었다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통렬한 반론이다. 그 순간 김종서는 왕의 재가를 얻기 위해 입궐을 시도하다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왕을 지켜야 했다. 문종의 유언을 받든 고명대신이었다. 왕을 지키기 위해서는 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을 바로 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왕의 신하였다. 자신이 가진 군권은 왕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사사로이 누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군을 움직인다면 왕명에 의해 왕의 의지를 받들어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던 김종서가 얼핏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로 인해 김종서는 물론 무수한 고관대신들이 죽었고 심지어 단종마저 죽었다. 그러나 그를 어리석다 말할 수 있을까?


사육신 역시 마찬가지다. 사육신더러 어째서 단종을 지키지 못했는가 따져묻는다. 학자들이다. 학자란 예로부터 고지식한 인종들이다. 정치적인 판단이 가능했다면 대세를 쫓아 신숙주가 되었을 것이다. 옳지 못한 것을 꾸짖는다. 명분을 따져 옳고 그름을 가려 마지막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순진한 것이다. 그런 순진한 학자들이었기에 수양대군이 던져준 달콤한 미끼에도 마음이 현혹되지 않았던 것이다. 판단은 잘못되었지만 그래서 그들은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원칙이 사라졌다. 결과가 과정을 정의한다. 결과가 모든 수단을 정의한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 그래서 수양대군의 쿠데타도 수양대군 자신의 치적을 들어 옹호한다. 한 편으로 김종서와 사육신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하지만 결국 조선을 수백년동안 지탱케 한 것은 끝끝내 김종서와 사육신의 신원을 관철해낸 사림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영리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올곧은 바보들이다. 왕보다, 어쩌면 나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그것이 갖는 가치일 것이다. 의미다.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죽음을 맞는다. 이순신더러 도성으로 쳐들어가 왕조를 바꾸라? 그런 이순신이었다면 지금껏 이토록 존경받고 있지도 못했다.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몸을 초개같이 던진다. 그런 군인이 없다. 필요하니 일어났고 필요했으니 권력을 잡았다. 그것을 정당화한다. 전쟁 도중 명령을 어기고 승리를 쟁취한 정도가 아니다. 지는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명령이 있다면 기꺼이 따른다. 바보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모두 너무 똑똑하다. 그래서 문제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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